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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 1287
    2016.09.07 (10:45:39)
    도서명: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송나라의 선승(禪僧) 차암 수정(此庵守靜)은 이와 같이 읊었다.

    개울물이 산 아래로 내려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한 조각 구름 마을에 드리움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함이라
    세상 살아가는 일
    이 구름과 물 같다면
    무쇠나무에 꽃이 피어
    온 누리에 봄이 가득하리.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안 보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마치 입 밖으로 말이 나오기 전에 침묵으로 잠겨 있듯이. 그러므로 안 보이는 상태는 뿌리이고 드러난 상태는 줄기와 가지다. 따라서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연원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늘 변하는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한겨울 아무것도 없는 빈 가지에서 꽃을 보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봄을 맞이한 사람이다.

       우리 육체란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은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한다. 콩깍지는 세월의 풍상에 닳아 없어질지라도 콩 자체는 그대로 남는다. 겉모습은 수만 가지로 바뀌면서도 생명 그 자체는 절대로 소멸되는 법이 없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그답게 존재하고 있다고 눈 밝은 현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문득 자신의 전생과 마주칠 때가 더러 있다. 어떤 길목이나 장소에 갔을 때, 혹은 그 이름을 들으면 까닭 없이 호감을 갖거나 거부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자력에라도 이끌리듯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보고 싶고, 그곳에 가면 오래전에 살았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갖는다. 어떤 사람과 마주쳤을 때 전류에 감전되듯 그 눈빛에서 문득 신뢰와 친근감을 느끼기도 하고, 목소리만 듣고도 거부감을 지니기도 한다.

       내 자신이 한때 몸담아 살았던 몇몇 절에서 느끼며 겪은 그 '자력'으로 인해 나는 전생에도 그곳에서 살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

       남쪽은 한창 꽃이 피어나는데, 이곳 오두막 둘레는 아직도 춘설이 분분하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차갑게 들려온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개울물 소리에 귀를 모으다가 문득 허허로운 생각이 일어 생명의 실상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봤다.

       20년쯤 지나면(제 명대로 살 경우) 나도 현재와는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겠구나 생각하니 세상일이 허무하기보다는 호기심이 일고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감마저 갖게 된다. 삶은 어차피 연원한 시작이요 지나가야 할 과정이니까. 한편, 남은 세월을 보다 유용하게 보내면서 이웃에게 좀더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나는 새로 짝을 이룬 화가인 최 교수 내외와 함께 부석사와 봉정사를 거쳐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온 일이 있다. 절은 어디나 비슷비슷해서 별다른 기대나 감흥 없이 지나왔지만, 하회마을은 그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오래된 마을이라면 볼 만한 고가(古家)가 있을 걸 예상했는데 남도의 예전 반상(班常)촌에 견주어 이렇다 할 고가가 없어서 기대에 어긋났다.

       그리고 반민속촌이 되어 버린 하회마을은 찾아드는 관광객들을 위해 길목마다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는 사라지고 상업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즘 어디를 가나 각박해진 인심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세월이 어떤 세월인가를 실감케 한다. 절 인심도 각박하기는 세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하회마을은 그 어귀에 번듯하고 깨끗한 화장실이 있다.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면서 다니다 보면 '볼일' 이 생기게 마련인데, 마을 어귀에 있는 그 화장실 말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강변에 있는 가게에서 한 노인을 만나 이 근처에 화장실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건넛집을 가리키며 그곳에 가보라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민박 식사' 라고 간판을 붙여 놓은 그 집은 대문도 없는데 토담으로 가려진 재래식 시골 뒷간이 (화장실이란 말은 여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안채와는 떨어진 입구에 있었다.

       낡고 허름한 판자문을 열고 변소에 한 걸음을 막 들여놓으려고 하자 안채 문이 열리면서, 누가 남의 변소에 들어가느냐고 앙칼진 목청으로 소리소리 질러댔다.

       머쓱해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도끼눈을 해 가지고 뭐라고 계속해서 고래고래 짖어댔다. 나도 한마디 큰소리로 짖어대지 않을수 없었다.

       "여보시오, 소변 좀 보려는데 이럴 수가 있소? 민박집이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소변도 못 누게 한단 말이오? '고객만당' 이라고 써붙여 놓고 장사 잘 하겠소. 에이 고얀 인심이로고,"

       그 집 벽에는 '입춘대길' 고객만당'이라는 입춘방이 한자로 써 붙여 있었다. 시골 인심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새마을운동인지 뭔지 하면서 소득 증대 정신을 쏟으면서 이웃끼리 나누어 먹는 풍습도 사라지고 말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각박한 인심을 보고 못내 우울하고 불쾌했다.

       예정대로라면 하회마을에서 하루를 묵어 오려고 했었는데 일요일날 길이 막힐 줄 알면서도 서둘러 떠나오고 말았다. 집이나 논밭 자동차나 가재도구 등 우리 둘레에 있는 것들은 삶의 소도구요 무대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물건과 몸담아 사는 장소와 생계 수단 등은 혼이 없는 무대 장치일 뿐이다.

       우리는 그 허구적인 배경이나 장치에 딴눈을 팔면서 진짜 삶의 알맹이는 망각하고 있다. 우리들 삶의 마지막 종점에 이를 때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기울였는가, 그리고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느냐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

       이웃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이 기뻐지고, 이웃을 괴롭게 하면 내 자신도 괴로워진다. 이웃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웃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내적인 평화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 자연스럽게 이웃을 돕는 일, 낯선 사람에게도 너그러운 것,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일,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를 쓰는 일 등등,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랑이며 친절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웃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이것이 사랑이며 친절이다.

       삶이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순간순간 부딪치고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가는 기운 같은 것.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곧 가슴속의 평화를 이룬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에게 좀더 따뜻하고 친절해지는 일이다. 이 따뜻함과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된다. 따뜻함과 친절이 없는 지식은 자칫 파괴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자신과 이웃에 상처를 입힌다.

       우리가 좀더 따뜻하고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들의 정신세계가 그만큼 확장될 것이다. 이웃에게 좀더 친절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세. 우리는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네.

    95. 5.
    글출처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법정스님, 샘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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