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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 3129
    2010.05.29 (17:58:59)
    도서명:   
        어제는 창을 발랐다. 바람기 없는 날 혼자서 창을 바르고 있으면 내 마음은 티 하나 없이 말고 투명하다. 무심(無心)의 경지가 어떻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새로 바른 창에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안이 한결 정갈하게 보인다. 가을날 오후 같은 때, 빈 방에 홀로 앉아 새로 바른 창호에 비치는 맑고 포근한 햇살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주 넉넉하다. 이런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으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행복해지려고 한다.

        당나라의 시인 왕유는 ‘가을밤에 홀로 안자(秋夜獨坐)’란 시에서,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늙어감이 서럽네’라고 노래했지만, 그는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의 그 넉넉하고 아늑함을 모르고 한 소리다. 이 넉넉하고 아늑함에 어지 늙음이 깃들 수 있겠는가. 텅 빈 충만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던가.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좋아하여 자신의 이름가지 유(維)라고 지었으면서도 그는 세속적인 때를 벗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지(韓紙)의 아름다움은 창호에서 느낄 수 있다. 양지의 반들반들한 매끄러움과는 달리 푸근하고 아늑하고 말할 수 없이 부드럽다. 양지가 햇빛이라면 우리 한지는 은은한 달빛일 것이다. 달빛의 이 은은함이 우리 마음을 편하게 감싸준다.

        영담 스님이 만든 한지를 구해다가 발랐다. 순 딱으로 만든 종이라 질기고 수수하다. 본인한테는 미안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그는 여승인데 강원도 원주에서 ‘전통한지연구소’를 차리고 좋은 한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떤 스님한테 그가 공수부대 출신이란 말을 듣고 얼마나 우락부락하게 생겼을까 싶었다. 더구나 고흥 능가사에 도둑이 들었을 때 차를 타고 달아난 도둑을 10리나 뛰어가서 맨손으로 붙잡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그랬었다.

        지난 초봄이든가 해가 질 무렵에 얌전하게 생긴 여승이 한 분 찾아 왔는데 그가 바로 영담 스님이었다. 그는 결코 우락부락하지도 않고 단정한 몸매에 말씨도 차분하고 얌전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인상을 말하면서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지난 5월, 그가 시험 삼아 만들었다는 몇 장의 종이와 함께 이런 사연을 우편으로 부쳐왔었다.

        <스님, 진달래꽃물 종이입니다. 연사흘 저와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 다섯 분과 열심히 따 모은 진달래꽃을, 곱게 찧어 항아리에 한 달 동안 삭히었다가 고운 체로 밭쳐낸 꽃물을 들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착염제로 쓴 백반이 무쇠 솥의 녹물을 쉽게 우려내리라는 예상을 못한 어리석음으로, 그만 제 빛깔을 죽이고 이런 색깔의 종이를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잠시 선홍빛 진달래의 설움이 제 설움이 되어 가슴 아렸지만, 한 마음 돌려서 다시 보니 이 빛깔 또한 좋고, ‘얻기 어려움’이라 싶어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내년에는 진달래꽃 제 빛 종이를 실수 없이 만들어 내리라고 생각합니다.>

        영담 스님이 이 편지를 쓴 종이가 바로 그 종이인데, 잔뜩 눈을 머금은 하늘빛 같은 그런 빛깔이었다.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의 말대로 얻기 어려운 빛이었다. ‘선홍빛 진달래의 설움이 제 설움 되어 가슴 아렸다’니 역시 여성의 섬세한 감성이구나 싶었다.

        편지는 뒤이어 이렇게 끝을 맺었다

        <스님께서 종이 만드는 일에 긍지를 가지라고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 일을 하는 데 대해서 긍지도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저 좋아서 만들고, 만들며 잊으면서 늘 자취 없는 마음입니다. 종이를 많이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몇 장이나마 스님의 즐거움이 되시기를 바라옵고 수줍게 올립니다.>

        편지의 사연이 그가 만든 한지처럼 담박하고 수수하면서도 정감이 흐르기에 나는 그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무슨 일이건 그저 좋아서 하고, 하고 나서는 잊으면서 늘 자취 없는 마음이라면 그 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일을 하면서도 그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대게의 경우는 자기가 하는 일에 얽매이게 마련인데, 자취 없는 마음, 즉 빈 마음이라면 어디에도 거리낄게 없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일도 이와 같이 할 때, 거기 삶의 무게가 내릴 것이다.

        아름다운 빛깔은 본래 자연 속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 그 빛깔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려면 먼저 욕심을 버리고 자연처럼 무심해져야 한다.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염직(染織)의 세계에서 뛰어난 어떤 사람은 식물(植物)에서 염료를 추출, 실을 물들이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고 한다. 한번은 봄눈에 꺾인 벚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는 분한테 가지를 얻어와 그 길로 솥에 넣고 삶았더니 벚꽃과 똑같은 빛으로 물들더라는 것이다.

        벚나무는 그런 빛깔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한겨울에도 안으로 물감을 마련하면서 산 것이다. 봄철에 꽃을 피울 때까지 나무는 1년 동안 전 생명력을 기울여 꽃의 혼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엄숙한 사실을 알 때 어떻게 함부로 꽃가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말은 없지만 나무가 얼마나 아파하고 한스러워하겠는가.

        그 염직가는 9월이 태풍에 큰 벚나무가 넘어졌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가지를 한 아름 얻어다 물들여보았지만 이때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고 한다. 식물은 그 시기가 있기 때문에 그 적기를 놓치면 그 빛을 볼 수 없다. 비슷한 빛깔은 낼 수 있어도 그 정기는 벌써 꽃과 함께 날아 가버린 것이다. 같은 생물이면서도 동물과 식물의 생태는 이처럼 판이하다.

        창호에 비치는 아침 햇살과 저녁 햇살은 그 밝기뿐 아니라 분위기가 다르다. 아침 햇살은 맑고 투명하고, 저녁 햇살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그 창호에 일몰이 내리면 빈 방은 좀 적막하다. 그러면서도 차분해진다.

        새로 바른 창 곁으로 어제 차편으로 보내온 가리개를 펼쳐놓으니 방안이 아주 고풍스러워졌다. 서예가인 청례 이영인님이 듬직한 한글 고체로 써서 보내준 글씨인데 마음에 든다. 벌써 오래 전에 마음 내킬 때 써달라고 휴정 선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골라 주고도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지난 여름 글씨를 썼다는 소식이 오더니 가리개로 만들어서 보내왔다. 내가 좋아서 옮기고 골라준 글은 다음과 같다.

        <출가하여 중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번뇌를 끊어 생사를 면하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어 끝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 글을 대할 때마다 안이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고, 출가정신을 거듭 다지지 않을 수 없다. 출가 수행자는 온 세상이 잠든 시각에도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큰 빚을 지는 길이다.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해탈의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말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내가 불일암으로 들어온 그해 겨울 청계가 산에 오면서 가로로 된 액자를 하나 가져왔었는데, 역시 한글 고체로 쓴 <선가귀감>에 나온 글이다. 다실(茶室)에 걸어놓았더니 보는 사람마다 탐을 내었다.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이 법문은 게으름뱅이들한테는 해당되지 않고 너무 조급히 서두는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다.

        한동안 바깥일에 팔리느라고 하다가 덮어둔 화엄경 번역 일을 새로 바른 창 아래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출가정신을 되새기면서 한 구절 한 구절 옮겨야겠다.
    <86 . 11>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

    2018.05.14 (13:20:29)
    유병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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