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비 오는 날이 많아지니 빨래도 잘 마르지 않고 마음마저 눅눅해진다.

마음은 물렁물렁한 반죽처럼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바꾸며 전염력이나 점착성이 강해진다.

어제는 우산을 챙기지 못해 거리에서 소나기를 맞았다. 오래만에 비를 맞으니 잠들어 있던 감각과 기억이 깨어

나는 것 같다.

 

비와 관련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다.

언젠가 중국 옌지 들펀에서 한 할아버지가 아기를 업고 빗속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벌거벗은 노인과 아기의 몸은 잘 먹지 못해 마른 수숫대처럼 여위었다. 노인은 비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더 이상 젖을 옷이 없기에 비를 피해 뛰어갈 필요도 없었다. 어린 자연을 업고 걸어가는 늙은 자연,

이상하게도 그 처연한 모습에서 어떤 평화가 느껴졌다.

 

또 다른 장면은 런던 바비칸 센터에 전시된 <Rain room>이다. 어둡고 거대한 방 한쪽에 인공의 비가 쏟아져내리는

사각의 공간이 있었따.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관객들은 빗속을 걸어다녔다.

하지만 실은 그 정교한 기계장치 속에서 사람들의 몸은 전혀 젖지 않았다.

천장에 뚫린 무수한 구멍들을 올려다보면 비가 쏟아지지 않는 통로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빗줄기 속에 빛나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러나 그들은 젖지 않은 몸으로 비의 방을 유유히 걸어나왔다.

 

두 장면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비에 젖은 자는 더이상 젖지 않는다'와

'비를 관람하는 자는 끝내 젖지 않는다'.

 

사람이 성장하고 문명이 진화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비와 해와 바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 아닐까.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행복하지는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글 출처 :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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