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참 마음이요, 둘째는 거짓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상시에 나다 남이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고 구분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것은 모두가 거짓 마음입니다. 본래 나의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의 참 마음인 줄 알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이는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인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 마음은 할 줄 아는 게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시비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가르고 이익과 손해를 가르며 나와 남을 가르는 일에 몰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별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거짓 마음은 마음의 안과 밖, 중간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음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실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답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허깨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꿈이, 물거품이, 그림자가, 이슬이, 번갯불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거짓 마음인 불별심은 인연 따라 느닷없이 생겼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까닭에 정해진 처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망한 마음을 고집하여 ‘나’로 삼는 까닭에 윤회가 거듭되는 것입니다. 인과(因果)를 주고 받고, 받고 주면서 끊임없이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 허망한 분별심이야말로 윤회의 주체이며, 생멸(生滅)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은 닦을 것이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닦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허공을 닦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마음은 다만 쉬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분별심을 쉬어주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마음공부입니다. 그래서 ‘쉬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심을 쉬게 하면, 본마음이 자연스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파도가 쉬면 본래의 물이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본래의 맑고 잔잔한 바다에는 온갖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져 있습니다. 파란 하늘은 파랗게, 하얀 구름은 하얗게, 둥근 것은 둥글게, 모난 것은 모나게 있는 그대로 말입니다.

 

본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어려서 섬진강을 바라보던 성품이나, 나이가 들어서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은 쭈그러져 늙었을지언정, 섬진강을 바라보는 성품 그 자체는 결코 쭈그러들거나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을 돌려 좌우를 돌아보십시오. 그럴 때 얼굴이나 눈은 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만, 보는 성품 그 자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종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종을 치면 그 소리가 생겨났다가 이윽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성품은 종소리와 함께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소리는 생멸(生滅)이 있지만, 종소리를 듣는 성품에는 생멸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몸은 잠이 들어도 성품은 잠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꿈에서도 보고 듣고 다닐수 있는 것입니다.

 

- 하략(下略) -

 

글 출처 :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월호스님 : 마음의 숲) 中에서..

 


배경음악 : Malaguena / Liberto & Ange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