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弔問)은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를 위문하는 것을 뜻한다.

고인이나 상제들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찾아와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는 예절이다.

요즈음에는 조문 대신에 문상을 간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문상(問喪)이란 죽음을 묻는다는

뜻으로 상주에게 상을 당한 것에 대한 위문 인사를 하는 것이며 조상(弔喪)은 빈소에

절을 하는 것이다. 조문(弔問)이란 조상(弔喪)과 문상(問喪)을 함께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고인(故人)에게 애도의 뜻으로 인사를 올리고 또한 상주에게 위문 인사를 동시에 드리므로

조문 간다는 표현이 옳다고 본다.

 

이와 같이 조문은 장례문화의 한 예절인데 한국의 장례문화의 장단점을 경험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친척이나 지인 등 여러 사람들에게 망자가 죽은 것을 알려서 장례식에 초청하는 부고나

부음에 관한 일이다. 망자가 부모라면 모든 지인에게 알려도 무방하겠으나 형제나 조부모 또는

빙부모 상이라면 부음을 알리는 범위를 깊이 생각하고 한정하여 지인 모두를 마구잡이로

초청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부음을 받은 사람의 상식선에선 전혀 조문할 일이

없겠으나 지인으로서의 도리로 보아 가야할지 말아야할지의 경계선에서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금전과 시간을 뺏기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둘째 상가 내에서의 조문 예절이나 머물면서 조심해야 하는 몇 가지를 살펴본다. 조문하는

마음가짐은 상을 당한 사람과 슬픔을 같이 하는 것이다. 유족에게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고 해서 고인에게 예를 한 다음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치며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격식을 갖춘다고 머리 굴려서 쓸데없는 말을 만드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유족의 마음을 헤아려 마음속 깊이 애통해 하는 잔잔한 눈빛이 예를 다하는

것이라 본다.

 

요즈음 상가에서 밤샘 화투나 카드놀이가 줄어들어 심신이 피곤한 상주들을 잘 배려하는

문화로 바뀌어 다행이다. 유족들의 비통함을 헤아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며

조문객끼리도 큰소리로 인사하지 않고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나누며, 건배의 의미로 술잔을

부딪치지 말아야 하며,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큰소리로 호상이라고 웃으며 떠들어대는

볼썽사나운 행동은 지양해야 하겠다. 아무리 장수한 고인이라 해도 이 세상을 하직한 것보다

더 애통한 일이 어디 있기에 호상이란 낱말을 공공연히 쓸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조문객은 그렇다 치고 상주가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면서 파안대소하며 호상이라고

지껄이는 장면도 많이 본다. “호상”이란 없어져야 할 최악의 단어라 주장하고 싶다.

 

요즈음은 장례문화가 많이 간소화되었다. 예전같이 좁은 집안에 빈소를 차려놓고 장례를

치르기보다는 시신을 임시로 모셔놓는 병원의 영안실부터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장례식장을

빌려 웬만한 것은 다 돈으로 처리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막상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서로서로 돕는다는 개념에서 새로 생겨난 문화인 상조라는 사업이 있으니 더욱 손

쉬워졌을 터이다.

 

TV를 보면 우후죽순처럼 상조회사가 늘어나 저마다 최상의 서비스를 하는 양 호도하지만 추천할 수

있는 방법은 상조보험을 들어 돈은 보험회사에 맡기고 상조서비스는 상조전문회사에서 받는 것이다.

상조보험은 보험료 형식으로 보험회사에 납부를 하다가 피보험자가 사망하면 보험사와 상조회사

간에 제휴를 통해 상조회사에 사망보험금의 일부를 납부하여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상조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나를 죽일 놈으로 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셋째 돈이나 물건을 보내어 상가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조의금이나 근조화환을 예로 들어본다.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이었던 망자의 장례식에서 본 일이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화환 정리를

얼결에 담당하게 되었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화환이 들어와 옆의 장례식장 통로까지 침범하다

못해 입구를 굽이굽이 돌아 급기야는 길가에까지 진열하게 되었다.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낸 것이

본만 떼어내서 진열하고 화환은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근조화환

스무 개 남짓만 지명도 순에 따라 진열하고 나머지는 리본만 따로 떼어 달아놓는 것이었다.

화환 배달하는 친구는 재활용할 생각에 신이 났을 것이다. 화환을 삼가라는 뜻은 아니나 내 이름

석 자 알리겠다고 상가마다 화환을 보내는 것은 심사숙고할 문제라는 것이다.

 

넷째 시신 처리 방식에 관한 예를 들어본다. 죽은 사람을 땅에 즉 무덤에 묻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적인 장례법은 비좁은 우리나라 땅의 면적에 비추어 볼 때 국토의 비효율적인 이용과

국토의 훼손 및 필요 이상의 장례비용이 드는 이유로 인하여 찬성할만한 장례법이 아니라고 본다.

묘를 돌보아줄 삼 사 대 아래 후손이 얼굴조차 본적 없는 선조에게 뭐 그리 깍듯한 정성으로

예를 다하여 돌보아 줄 것인가 말이다. 결국에는 잡초로 뒤덮인 황폐한 무연고 묘가 되어

조롱이나 받을 처지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 한국 묘지 중 40%가 무연고 묘이다.

 

일부 사설 수목장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납골이나 묘지보다는 화장한 뒤 뼛가루를 나무 밑에

묻거나 뿌려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장례법인 수목장이나 아무 흙이나 강에 뿌리는

"산골” 방식이 가장 친환경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권장할만하다고 본다. 수목장이나 산골은

장례문화의 혁명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가 좁고 묘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국토이용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필요한 문화이다. 장점으로는 묘지로 허비되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땅이 없는 서민들에게 유효한 문화이며 허례허식을 피할 수 있고 환경 친화적임을

꼽을 수 있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로 인한 따른 종교적인 예식 차이도 말해보고 싶고 조문시의 옷차림이나

음식 준비나 부의금 전달 및 상주끼리의 배분의 문제점까지도 논하고 싶었으나 생략한다. 우리의

전통 관혼상제의 4례가 보존해야 하는 미풍양속이 많다고는 하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격식보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을 치름에도 잘 치르는 것 보다는 슬퍼함이 낫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형식보다는 실제가 앞서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격식보다 마음이 우선이라는 주장과 관련하여 한마디 해보려 한다. 십여 년 전부터 아들에게 수시로

못박아두는 말이 있다. 나는 이미 장기기증을 포함한 시신을 병원에 기증한 사람이다. 꼭 알아두어라,

병원에는 이렇게 말하여라. 시신을 연습용으로 해부하고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되면 남은 시신 쓰레기는

소각하여 병원 측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게 하여라. 무덤이고 납골이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단다.
다 썩은 몸이 묻혀진 무덤에 절을 하면 무엇 할 것이며 재만 남은 항아리에 묵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장례식도 올리지 말거라. 시신도 없는 장례식이 뭐 필요하겠느냐? 신부님 모시고 장례 미사 한 번으로

족하다. 상조회사 필요 없고 장례식장 필요 없으며 밤새워 조문 받을 일도 없고 편하지 않느냐?

또 제사나 명절 차례도 지내지 말거라. 그나마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보는 기회는 될 수 있겠으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으니 형제간의 우애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라. 격식보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임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라는 뜻이다. 정 그립고 생각이

나면 연미사나 가끔씩 넣어라. 일 이 년에 한 번 생각날 때 연도를 받쳐주는 것은 말리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