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넘기기가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해가 바뀔 때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질 때쯤. 다가오는 서른이 두려웠던 어느 날, 두려운 건 나이만이 아니었다. 통장 잔고가 딱 0원이었다. 박사과정을 마치기는 했지만 수료만 했을 뿐 논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고, 과연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기만 했다.

   취직의 가능성 또한 없었다. 늘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했지만 매사에 열정을 잃어버렸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만이 내게 남은 단 하나의 불꽃이었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군데에서 과외 교사 자리가 들어오고 고등학교 임시 교사 자리를 추천해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드디어 내게도 구원의 동아줄이 내러오는 건가 싶었다.

   그때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아니잖아.’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웠지만, ‘당장 돈이 없어도, 내가 원하는 걸 결코 포기하지는 말자’라는 생각만은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나는 일자리를 거절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가난했지만 글 쓰는 일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은 것은 그때가 내 인생의 결정적인 과도기였다는 사실이다. ‘나이 서른에 통장 잔고가 0원’이라는 비참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이에 구속받지 않는 삶’이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만약 그때 ‘꿈’이 아니라 ‘일자리’를 선택했더라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지금은 할 수 있고 그때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해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이 정말 좋구나.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성숙하며,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운 시간이구나.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나잇값을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텐데. 어떤 사회적 성취를 쌓아서가 아니라 그 나이에 맞는 깨달음과 감수성을 지닌 사람, 너무 늙어 보이지도 너무 어려 보이지도 않는 제 나이의 성숙함을 지닌 사람들이 진정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 안에는 일곱 살 꼬마와 꿈 많은 스무 살 여대생과 이제 좀 인생을 아는 중년 여인과 사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가 함께 살아간다. 다양한 연령대의 자아들이 어울리는 순간에 제때 튀어나와주면 좋으련만, 자꾸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자아가 튀어나와 문제다.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 느닷없이 철딱서니 없는 일곱 살 꼬마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고, 오랜만에 귀여운 척 애써 연기하고 싶을 때는 세상 다 살아버린 듯한 구수한 노파가 튀어나와 로맨틱한 분위기를 망쳐버린다.

   나이에 맞게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항상 지나치게 조숙하거나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무리의 막내 역할을 떠맡으면서 나는 항상 내 나이를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서늘한 소외감을 짊어지고 다녔다. 때론 너무 조숙하고, 때론 너무 철없는 내가 걱정스럽다. 제 나이에 맞게 사는 게 왜 이토록 어려울까.

   제 나이에 맞게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아직도 쉽지 않은 화두이지만 멋있게 나이 드는 이들을 볼 때마다 종종 발견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예쁜 순간은 ‘무언가를 잘 모르는 모습’과 ‘무언가를 어떻게든 알려고 애쓰는 모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다. 내 어린 조카는 작년에는 ‘백 살까지 살겠다’고 선언하더니, 올해는 ‘백만 살까지 살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작년에 알던 가장 큰 숫자는 100이었는데, 올해는 100만을 알았으니 기특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뒤섞여 더욱 귀여운 것이리라.

   한창 때의 젊은이가 아름다운 순간은 열정과 수줍음이 충돌해 어찌할 바를 모를 때다. 열정을 표현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야 하는데, 이럴 때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너무 나서는 게 아닐까’를 걱정하는 수줍은 마음이 섞이며 그 모습이 참 어여쁘다.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을 배려하는 사람. 자신도 힘들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젊은이들을 보면 더욱 멋져 보인다.

   중년이 아름다운 순간은 ‘저 사람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구나’하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다. 일에 빠져 인생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모르는 얼굴,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려 야단법석을 떠는 얼굴보다는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사람들의 고뇌 어린 얼굴이 아름답다.

   노년이 아름다운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해주는 메신저’의 모습을 보일 때다. 훈계조나 명령조로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로 빛나는 모범을 보이는 노년이야말로 세상의 귀감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은 ‘내 삶’과 ‘내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이의 거리 조절인 것 같다.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내 삶이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내 일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따뜻하고 자비로운 사람일까. 이렇게 질문하는 나, 성찰하는 나, 가끔은 스스로를 마음의 죽비로 칠 수도 있는 나의 냉철함과 성숙함이 스스로를 자아도취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게 하는 최고의 멘토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 들어 소중하게 느껴지는 ‘삶의 기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노력 앞에 경의를 표할 줄 아는 ‘감상의 기술’이다.

   눈을 감고 귀 기울이는 음악, 한 시간씩 바라보게 하는 그림, 나른한 오후에 펼쳐 읽은 책 한 권, 하늘과 나무와 바다와 별들, 이 모두가 이 세상의 퍼즐을 맞춰가는 아름다운 ‘감상의 개상’들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심미적 대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여유와 탐미적인 시선이야말로 ‘제 나이에 맞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Karen Horney)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정말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더 나아가 매순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더 나은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바로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갈 것이다.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