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길에는 가랑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올 가을은 가뭄이 심해 물든 나뭇잎들이 이내 이울다가 서릿바람에 휘날리며 낙엽이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가랑잎을 밟으면서 산길을 거니노라면 세월의 덧없음을 새삼스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여름날 무성하던 잎들이 가을바람에 시름시름 앓다가 낙하하여 땅 위에 뒹굴고 있는 모습을 대할 때, 계절의 질서와 함께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의 실상을 엿보는 것 같다.

    뜰에 서 있는 후박나무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번번이 사람의 발소리인가 싶어 귀를 모으곤 했었다. ‘뚝’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문득, 이 순간에 누군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우주 생명의 바다에서 보면, 탄생과 죽음의 고리로 이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면의 탄생은 그 순간부터 죽음으로 이어지고, 한 목숨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변하거나 죽지 않고 언제까지고 한결같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한때를 어떻게 사느냐에 의해서 삶의 양상은 천태만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삶의 양상은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개인도 그렇지만 공인의 경우는 그 진폭이 훨씬 크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역사는 인과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완전범죄란 허용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언론의 회생과 함께 하나하나 우리들의 지나온 날들의 실상이 밝혀질 때마다 우리가 어떤 세월 속에서 살아왔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온갖 비리와 부정과 억압과 강탈과 폭력이 난무하던 사회를 우리가 살아온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생애의 귀중한 한 세월을 그런 먹구름 속에서 지내왔는가 싶으니 어처구니가 없고 허탈해지려고 한다.

    그런 세상을 통치하는 당사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하며 청렴결백한 공직자 운운하면서 우리 모두를 속여 온 것이다.

    떠도는 소리는 있어도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는 나라 살림살이를 알 길이 전혀 없었다. 만약 보도매체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활개를 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결국 언론의 부재는 정권을 탈취한 당사자들이나 국민 모두에게 다 같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가져오고 말았다는 명백한 역사적인 교훈이 우리 시대에 증명된 것이다. 언론의 학살은 그 언론을 학살한 당사자의 비참한 종말을 자초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인과관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난번 5공 비리 일해재단 청문회를 지켜보면서도 역사와 인과관계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증인석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가 한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거나 그 권력을 업고 행세하면서 한 시대를 주름잡던 이들이다. 그 권력이 막을 내리니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발뺌하기에 급급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청문회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가랑잎 구르는 소리를 연상했었다. 한때 서슬이 푸르게 무성하던 잎들이 떨어지니 서릿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내는 그런 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잎이 지면 어디로 돌아가는가.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이 다시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란 무엇인가. 사람이 서야 할 자리, 사람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 끝없이 헤매게 된다. 헤매는 일은 짧을수록 좋다. 제자리를 찾아 인간의 대지에 든든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도의 차이지 큰 눈으로 보면 모두가 거기거기일 것이다.

    가해자건 피해자건 돌아 세워 놓은 뒷모습은 모두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이고, 저마다 인간적인 우수가 깃들어 있다. 문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허물을 얼마만큼 바로 인식하고 진정한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간적인 자질이 가늠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권력도 금력도 명예도 체력도 사랑도 증오도 모두가 한때일 뿐, 우리가 어떤 직위나 일에 나아가고 물러남도 그런 줄 알고 진퇴를 한다면 분수 밖의 일에 목말라하며 연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숲은 나목(裸木)이 늘어가도 있다. 응달에는 빈 가지만 앙상하고, 양지쪽과 물기가 있는 골짜기에는 아직도 매달린 잎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무서리가 내리고 나면 질 것은 다 지고 말 것이다.

    때가 지나도 덜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잎은 보기가 민망스럽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산뜻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빈자리에 새봄의 움이 틀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의 종말로만 생각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 볼 줄 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 앞에 보다 담담해질 것이다. 다된 생에 연연한 죽음은 추하게 보여 한 생애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가랑잎도 하루 이틀 지나면 너절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날이 밝으면 말끔히 쓸어내어 찬 그늘이 내리는 빈 뜰을 바라보고 싶다.
(88 . 11. 20)
글출처 : 텅 빈 충만(법정스님 :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