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뻐꾸기가 자지러지게 울 때면 날이 가문다. 어제 해질녘에는 채소밭에 샘물을 길어다 뿌려주었다. 자라 오른 상치와 아욱과 쑥갓을 뜯어만 먹기가 미안하다. 사람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갖가지 음료수를 들이키면서, 목말라 하는 채소를 보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채소밭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그 생기는 보살핌에 대한 응답이다.

    오늘은 발을 꺼내어 쳤다. 발을 통해서 보는 둘레가 한결 운치 있다. 알맞게 가림으로써 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사물의 비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가리기보다는 자꾸만 드러내 놓으려고 한다. 안으로 거두거나 간직할 수 없도록 내면이 허약해진 탓인가.

    산에만 묻혀 살다 보면 세상 물정을 알 길이 없어 지극히 관념적인 사고에 떨어지기 쉽다.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저자에 나가보아야 움직이는 세상을 실감할 수 있고, 산의 살림살이가 새삼스레 비쳐 보인다.

    며칠 전에 가까운 도시의 저자에 나가 쌀과 콩을 팔고 망가진 굴뚝을 고치기 위해 오지로 된 토관(土管)을 구해왔다. 그리고 장마철에 나무벼늘을 덮을 비닐 우장도 몇 장 맞추어 왔다. 이제 갓 6월에 들어섰는데도 도시는 벌써 여름을 타고 있었다. 팔을 온통 드러내고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가슴을 열고 속살까지도 훤히 내비치는 그런 옷을 조금도 스스럼없이 걸치고 나다닌다.

    어린애들이라면 산뜻하고 귀엽기라도 하지만, 성인들의 경우는 아무래도 끈적거리고 추해 보인다. 현대가 허세와 과시와 노출의 시대인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집안이 아닌 거리에서 드러낸 지나친 노출은 속된 인품과 무례함을 넘어다보게 한다. 우리 몸에 짐승처럼 털이 돋지 않은 것은 옷으로써 알맞게 가리라는 뜻이 아닐까. 가릴 것과 드러낼 것을 분별할 중 알아야 우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그 시끄러움과 혼잡 속에서도 의연히 앉아 마치 예배라도 보는 듯 한 엄숙한 모습으로 TV화면에 넋을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신흥종교인 텔레비전교(敎)의 신자들이요 영상의 노예들.

    이런 현상은 터미널만이 아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도 거의가 그 바보상자 앞에서 부동자세이고, 차를 타도 운동경기를 중계하거나 저질 영화를 틀어대고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는지 대망의 80년대가 한심스럽기만 하다.

    전문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TV시청은 사람의 뇌를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한다. 인간의 뇌파(腦波)에는 주의를 집중하거나 책을 읽거나 적극적인 활동을 할 때 나타나는 베타파(波)와 뇌의 활동이 저하될 때 나타나는 알파파가 있다는 것. 이 가운데서 알파파는 수동적인 무반응의 멍청한 상태를 가리킨다. 임상실험에 의하면, 시청자가 TV스위치를 켠 후 20분쯤 지나면 거의 모든 사람의 뇌파가 알파파의 멍청한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텔레비전교의 신자가 되면 자신의 판단력을 잃고 방송국에서 보내는 내용에 그대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활한 정치인들이 우민(愚民) 정책을 쓰는 데는 더없이 고맙고 편리한 연장이겠지만,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덫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 같은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한 감옥’에 비유하고 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추어져 있고, TV 숭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그런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런 감옥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시들하고 따분하고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성(日常性)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나름의 투철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 자기질서를 세우려면 안이한 일상성에 대한 저항과 맺고 끊는 결단이 필요하다. 한 그루의 나무를 기르기 위해서도 불필요한 곁가지의 전정이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인간형성의 길에 있어서랴.

    요즘처럼 시끄럽고 복잡하고 어수선한 세상에서는 뭣보다도 단순한 삶이 긴요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스스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한 삶이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고 본질적인 삶을 이룬다. 가구나 실내장식도 단순한 것이 부담이 적고 싫증도 덜 난다. 인간관계도 복잡한 것보다도 단순한 것에서 보다 살뜰해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 그리고 타성에 젖은 습관과 둘레의 흐름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서 헤어나려면 밖으로 눈을 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새로운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자기억제와자기질서 아래서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적게 보고, 적게 읽고, 적게 듣고, 적게 먹을수록 좋다. 그래야 인간이 덜 닳아지고 내 인생의 뜰이 덜 시든다. 보다 적은 것은 보다 풍요한 것이니까.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데 있다.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인생을 살 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아래서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5월 하순에 볼 일로 부산에 갔다가 오랜만에 한 친지를 찾아본 일이 있다. 자리를 같이 한 지 10분도 채 못 되어 나는 심한 피로를 느끼었다. 까닭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이렇다 할 이야기 거리도 없이 건성으로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공통적인 지적(知的) 관심사가 없으면 이야기 또한 범속한 일상성을 맴돌게 마련이다. 일상성이란 일종의 겉치레인데, 알맹이가 없는 그 겉치레가 우리를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가.

    오늘날 여기저기서 가정의위기를 말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서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대화란 서로가 창조적인 삶을 통해 새롭게 펼쳐 나가는 것. 창조적인 노력도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도 없다면 자연 시들한 일상성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서로가 생의 활기를 잃고 차디찬 의무만 남아 풍요한 감옥에 갇히고 만다.

    풍요한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뭣보다도 정신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끼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보람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

(85. 7)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