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 되면 새해의 수첩을 사온다. 수첩 끝에 붙어 있는 방명록 난에 친지나 거래처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는다. 그런데 이 일이 요 몇 해 사이에는 왠지 머리 무겁게 여겨져 자꾸만 미루다가 해가 바뀐 1월 중순이나 하순에 가서야 하는 수 없이 큰맘 먹고 단행한다.

    보다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될 수 있는 한 엄격히 선별하고 통제하여 그 칸을 해마다 줄여오고 있다. 그런데 이 줄이는 일만은 굳이 연말이나 연초를 기다릴 것도 없이 안으로 어떤 결단이 있을 때마다 북북 그어버린다. 내 의식의 분산을 막기 위해 가진 것들을 미련 없이 정리 정돈하듯이 내 속뜰에서 시들해진 그 자취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작년 것을 보니 열두 군데가 지워졌고, 올 ‘85년 수첩에는 무려 스물세 군데나 지워졌다. 지워진 곳이 남아 있는 곳보다 훨씬 많다. 물론, 수첩을 바꿀 때는 빈 칸이었다가 도중에 새로 써 넣은 것도 더러는 있다. 하지만 그 수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복잡한 세상살이에 견줄 때 산의 생활은 지극히 단순 명료하다. 그러기 때문에 수첩에 적어 놓은 일들을 펼쳐 보면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싱거운 일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어쩌다 길에 흘린 내 수첩을 누가 주워본다면 미소를 머금고 주인에게 당장 돌려주고 싶을 것이다. 타인에게는 싱거운 일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기록들이 결코 싱거운 일도 작은 일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주로 기록되어 있는가 몇 군데 펼쳐 보기로 한다.

    --부풀어 올랐던 매화 꽃망울이 지난 밤 휘몰아친 ㅣ눈바람에 많이 졌다. 속이 상한다(2월 22일).

    석축 아래서 수선화가 활짝 문을 열었다(4월 7일).

    보성 차밭(東洋茶園)에 다녀오다. 햇차의 신선한 향기, 모란 피어나기 시작(4월 30일).

    5월 8일에는 첫 꾀꼬리 노래를 듣고, 이틀 후에는 뻐꾸기도 왔다고 적었다. 또 언제 장마가 개고, 어느 날 해질녘엔 무지개가 돋았고, 김장은 언제 갈고, 어디 장에 가서 무슨 연장을 사오고, 무슨 책 일고, 누워서 별을 쳐다보고····, 주로 이런 기록들이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해마다 꼬박꼬박 기록한 수첩이 어느덧 서른 개나 된다. 이곳으로 옮겨올 때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대까지의 수첩은 모두 태워 없앴다.

    태워 없애는 일은, 그때그때 자기 삶의 정리정돈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날이 너절한 찌꺼기에 걸려 현재의 삶이 개운치 않다. 내가 무슨 역사학도라고 대단치도 않은 기록을 남기겠는가. 언젠가는 이 몸도 불에 태워지고 말 텐데.

    연말이면 행사처럼 아국이 앞에 앉아 편지도 태우고 사진도 불태워 없애고 불필요한 기록들도 불속에 던져버린다. 기록이란 특히 우리처럼 단순 명료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인 연장은 불필요하다. 태워버리고 나면 마치 삭발하고 목욕하고 난 뒤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솟는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거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

    찾을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이 마음을 가지고 어디에 매어두어야 한단 말인가. 찾을 수 없는 마음이라면 텅텅 비워버려야 한다. 텅 빈 데서 비로소 메아리가 울린다. 어디에도 집착이 없는 빈 마음이 훨훨 날 수 있는 자유의 혼을 잉태한다.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 것은 거울 자체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만약 무엇이 들어가 있다면 거울은 아무것도 비출 수 없다. 그것은 거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친구란 서로가 빈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서로의 빈 마음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그런 사이여야 할 것이다. 그 어떤 선입관념을 가지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맞은편의 빈 마음에서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속엣 말을 터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친구이고 싶을 뿐이지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한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예언자> 가운데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친구를 사귐에는 오로지 정신을 깊이 하는 일 말고는 딴 뜻을 두지 말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가 정신을 깊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망스러운 일이다. 정신을 깊이 하는 일을 통해서, 서로가 힘이 되고 빛이 되어 한없이 승화할 수 있다. 형식논리로는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정신을 깊이 하는 창조적인 우정에는 둘을 넘어 열도 백도 될 수 있다.

    정신을 깊이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절과 신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 예절과 신의를 바탕으로 서로 간에 창조적인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속한 사귐과 한때의 알고 지냄에 그치고 만다.

    지난 여름휴가철, 내가 잘 아는 집 아무개 양이 집안에서 혼담이 오고가는 사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왔었다. 그런데 날씨가 좀 덥다고 해서 그 청년이 파자마 차림으로 갈아입은 걸 보고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중이야 사람 축에도 못 끼니까 실례될 건 없다. 하더라도, 아직 결혼도 하지 전에 속옷 바람으로 마주하고 있다니 버릇없고 무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한 사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초면이라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ㅇ낳았지만, 그들이 내려간 뒤 그 ‘파자마’의 처남될 ㅅ군에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절을 지켜야 할 거라는 잔소리를 한참 해주었다. 물론 그들에게 전하라고 해서다.

    우리가 친구를 찾는 것은 우리들의 좀 모자란 구석을 채우기 위해서지, 시간이 남아 주체할 수 없어서 찾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절과 신의와 창조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서로에게 아무런 덕도 끼칠 수 없다. 빈 꺼풀끼리는 이내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니까. 그러니 상호간에 끊임없는 오력을 기울여 그 사이가 날로 새로워져야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된다.

    얼마 전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이런 글을 써 보냈다.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얽매지는 말게. 마치 한 가락에 울리는 거문고 줄이지만 그 자리는 따로따로이듯이.’

    역시 지브란의 말.

    새해의 수첩은 구해 왔지만 아직 주소록은 옮기지 못했다. 이번에는 더욱 엄격히 가려 내 삶의 행동반경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다.

    50여 년 전 내장산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학명 스님은 새해 아침에 이렇게 읊었다.

묵은해니 새해니 가리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라고,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살지

    그렇다 하더라도, 해가 바뀌면 저마다 자기 삶을 새롭게 다질 수 있어서 좋다.

(86. 1)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