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큰절 원주스님이 광주로 장보러 가는 길을 구경삼아 따라가 본 일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정신없이 다니다가 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채소와 과일과 식료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대 문득 떠오른 것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먹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시장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가짓수가 그토록 많은가 싶으니 먹지 않아도 뱃속이 그득하게 불러오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사람의 식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즐겨 먹는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처럼 채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푸줏간이나 생선가게 혹은 건어물이나 젓갈을 파는 곳과는 인연이 멉니다. 그 앞을 지나칠 때면 섬뜩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좀 안된 표현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짐승과 물고기들의 시체가 진열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고기와 생선이 없이는 밥이 넘어가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그러한 진열을 볼 때 왕성한 식욕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생활 형편은 요 근래에 들어서 놀라울 만큼 많이 달라져 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관계당국의 조사에 의하면, 작년 한해만해서 지렁이는 35만 1천 달러어치를 수입하고, 뱀은 국내에서 잡히는 것만으로는 그 수요에 충당할 수 없어 31만 2천 달러어치를 수입 해다가 먹었다고 합니다.

    그 중 코브라가 대략 3만 마리나 된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다. 굼벵이, 고양이까지 이른바 ‘건강식품’이라고 해서 비싼 외화를 들여 수입해온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니 글쎄 지렁이, 굼벵이, 뱀까지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는다니 말이 됩니까. 우리나라는 지금 4백 억 달러에 가까운 막대한 이국 빚더미 위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빚 많이 지기로 네 번째 가는, 결코 명예롭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빚꾸러기 주제에 지렁이, 굼벵이, 뱀까지 수입 해다 자신다니 이게 될 말입니까.

    소는 한 해에 40만 마리나 도살되어 우리 국민들이 식탁에 오른다고 합니다. 이거 보통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때도 가리지 않고 먹어댑니다. 기분 좋다고 먹고, 기분이 나쁘다고 먹고, 싸웠다고 먹고, 화해했다고 해서 먹고, 배고프다고 먹고……. 그 이유 또한 한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위장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위장이 무슨 죄를 지었기로 그토록 혹사를 당해야 합니까. 한 평생 내 생애와 더불어 있어야 할 소화기가 쉴 틈도 없이 혹사를 당해야 하다니 안쓰럽지 않습니까. 위장의 인내에도 한도가 있습니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에라 오르겠다고 마침내 그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학자들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일반 동물의 세계에는 위장병이 없다고 합니다. 먹을 만큼 먹고는 자제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동물이라고 자칭하는 그 사람에게만 위장병이 있다고 합니다. 먹을 것 안 먹을 것 마구 먹기 때문이고, 먹을 만큼만 먹어야할 텐데 한없이 먹어대기 때문에 위장의 기능을 스스로 죽이게 된 것이지요.

    현대인들의 온갖 질환은 못 먹는 데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먹는 데서 온 것이 훨씬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많이 먹는다고 해서 그대로 다 흡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연히 몸만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결국 과욕 때문에 도리어 사람이 먹히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먹을 것 안 먹을 것 가릴 줄 알아야 하고, 그 양을 헤아려 스스로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수의 비결은 기름지게 잘 먹는 데 있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단박하고 조금 모자라게 먹는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므로 먹고 마시는 음식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정신적인 양식도 필요합니다. 몸무게가 불었느냐 줄었느냐, 혹은 얼굴에 기미가 생겼느냐 지워졌느냐, 혈색이 밝으냐 어두우냐 등에는 적잖은 관심을 쏟으면서 자신의 정신상태가 지금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투명한지 불투명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떼려야 뗄 수 없도록 밀접한 관계임을 안다면 육체적인 건강에 못지않게 정신건강에도 관심과 열의를 두어야 합니다.

    지식이나 정보도 지나치게 많은 것을 지니려고 한다면 그도 또한 과식처럼 불 건강의 요인이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전 사람들에 비한다면 너무나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그만큼 다양해지고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가치가 그만큼 향상이 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점에 오늘의 문제가 있습니다.

    날마다 보도에 오르내리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십시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같은 사람의 손으로, 그것도 가까운 사람이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빛이 별로 안 보입니다.

    이런 현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이요, 내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인간인 처지에서 우리들의 한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맑아야 할 의식이 그만큼 얼룩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같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았지만 ‘사람의 자리’만은 꿋꿋하게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으면서 사람의 자리를 지킬 줄 모릅니다. 조그마한 눈앞의 이해관계에 걸려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크고 작은 우리 둘레의 비정한 사건들은 한마디로 사람의 자리를 지키고 가꾸기를 저버린 데에 있습니다.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의 자리와 그 분수에 어울리는 생각과 행동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복잡하고 호사스럽게 되면 ‘사람의 자리’가 흔들리게 되고 따라서 생각과 행동도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밥상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너무 여러 가지를 합쳐 놓으면 우리들의 의식이 그만큼 분산되어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입에 맞는 음식 두세 가지면 맛있게 먹을 수 있지요. 지식이나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 사람들은 흔히 그 아는 것에 걸려 사람의 자리를 비우는 수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많이 아는 일에 팔려서는 안 됩니다.

    못 배워서 조금 알더라도 그것이 사람의 자리에 비추어진다면 하나를 통해 열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 지혜의 세계입니다. 메마른 이론이 아니고 살아서 움직이는 행위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지혜의 세계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저 많은 것을 듣고 알려고만 하지, 그것을 어떻게 사람의 자리로 이끌어 들여 삶을 풍성하게 북돋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너무 많은 것을 가리지 않고 때 없이 닥치는 대로 마구 먹기 때문에, 마침내는 사람이 먹히고 만다는 모순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또한 절제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복잡한 세상의 오염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이절(寺) 저절 많은 절을 다닌다고 해서, 혹은 큰스님 작은 스님 많은 스님들을 안다고 해서, 또는 어떤 불사에 시주금을 많이 낸다고 해서 공덕이 되거나 신심이 늘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삶을 안으로 조용히 살피면서 살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화질도 어지간히 하고 별일도 없이 절에도 자주 드나들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 분수를 살피고 사람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거듭거듭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인간 향상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범속하고 타성적인 인간관계 또한 사람을 흐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불자라면 불자다운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83. 6)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