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가까이 산 위에서 살다가 산 아래 골짜기로 내려와 지내는 요즘,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은 뜰이 인간의 생활에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밝은 햇살과 맑은 바람이 지나고, 멀리 툭 트인 시야와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뜰을 어슬렁어슬렁 거닐고 있으면 생각의 실마리가 저절로 풀린다. 그런데 둘레가 담장으로 막히거나 다른 집으로 가려진 곳에서는 거닐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지만 생각이 한군데 갇혀서 맴돌려고 한다.

    사람의 생각이란 마치 물과 같아서 어디론지 흘러가야만 살아서 생기를 발하는 법인데, 그렇지 않고 가만히 한곳에 갇히거나 머물러 있으면 침체되어 상하고 만다. 따라서 사람이 거닐 수 있는 공간과 그 분위기에 의해 생각의 틀은 전혀 달라진다.

    가령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뒤덮인 길에서는 팍팍해서 오래 거닐 수도 없지만, 생각도 굳어져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잡초가 무성한 오솔길은 걸을수록 새롭고 생각도 말고 싱싱하게 지닐 수 있다. 동서고금의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드넓고 번듯한 한길을 접어 두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산책의 길로 택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 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시골 농부들은 그 주거환경 자체가 논밭과 연결되어 있다. 그 거리에 멀고 가까움이 다를 뿐, 굽이굽이 오솔길을 따라 농토로 이어져 있다. 요즘은 농로가 넓혀져 달달거리는 경운기가 요란하게 오고가지만, 아직도 오솔길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시골 사람들은 소를 몰고, 혹은 지게를 지고 그 길을 오고가면서 농사일을 헤아리고 인간사를 생각한다. 언제 씨앗을 뿌리고, 누구와 품앗이로 김을 매줄 것인가, 그리고 비료와 농약과 거두어들일 날들을 생각한다. 또는 아무개네와 사소한 일로 성기어진 사이를 이다음 장날에는 만나서 풀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길 위에서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딸 걱정도 그 길 위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는 그런 뜰이, 오솔길이 거의 없다. 있어보았자 거닐 여가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늘 시간에 쫓기고 교통지옥에 시달리느라고 그런 마음조차 낼 수가 없다. 문밖에 나가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차가 채어 가 버린다. 그러고는 사무실에 갇혀 열심히 숫자놀음을 해야 한다. 혹은 새로운 문서를 기안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고 초여름이 손짓하는 창밖을 내다볼 여유조차 없다.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한 관계자들은 결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닌 줄로 안다. 밖에 나가서까지 배울 만큼 배우고 돌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시민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우해 도시에서 녹지의 공간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누구보다도 그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이루어진 기성도시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신도시 건설의 경우를 보면 유감스러운 정도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서울의 강남 영동 시가지를 들 수가 있다. 우리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개발 이전의 그 일대는 야산과 수목으로 덮인 녹지가 많았었다. 그 녹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도시를 세웠더라면 오늘처럼 삭막하고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재정 상태를 모르는 바 아니다. 네땅 내땅 가릴 것 없이 무슨 작전지역처럼 불도저로 깡그리 뭉개어 그 체비지에서 얻는 수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눈앞의 이해타산에 급급하다보니 현재와 같은 형편없는 비인간적인 도시를, 콘크리트의 거대한 궤짝들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사람을 한곳에 많이 끌어들였으면서도 그 생활환경은 엉망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새로 이루어진 도시에서는 사유(思惟)의 뜰이 없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각을 펼쳐나갈 정서 공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무표정한 도시에서는 이따금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끔찍한 사건과 사고는 많아도, 인간의 훈훈한 체취에 대해서는 듣고 보기가 어렵다. 여행 중에 경향각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시가지를 지날 때면 선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과연 이런 삭막한 도시에서 노자(老子)나 달마(達磨) 혹은 베토벤이나 괴테, 원효(元曉)나 겸재(謙齋)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을까.

    신체 구조상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은 똑바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직립보행의 자세에 있다. 사람이 걷는 것은 꼭 무슨 볼일이 있어 어디로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저 일없이 왔다 갔다 하기 위해서도 걷는다. 그와 같이 어슬렁어슬렁 걷게 되면 마치 악기가 조율되듯이 흩어졌던 생각이 한곳에 모아지게 된다. 차디찬 쇠붙이와 콘크리트 벽 속에서는 제대로 생각이 트이지 않고 맴돌다가도, 툭 트인 산과 들의 오솔길에 들어서면 막혔던 생각이 술술 풀려 나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도시형 관념적인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뭣보다도 사유와 사색의 뜰을 가까이 해야 한다. 주말에 배낭을 메고 산을 찾아나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사색의 뜰을 갖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나 기를 쓰고 정상에만 오르려고 하면 그 성취욕에 눈이 가려 오고 가는 길 위에서 거닐 수 있는 그 ‘들’을 잃어버리고 만다. 가령 아파트에서 사는 경우라면 시멘트 바닥으로 된 복도에서만 서성거릴 것이 아니라, 어린이 놀이터 같은 데라도 나와서 거닐어 보면 새로운 숨길이 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체험이지만, 이따금 볼일이 있어 도시의 절에서 며칠씩 머물 때가 있는데, 그대마다 느낌은 마치 숲속에서 멋대로 뛰놀던 짐승이 우리에 갇힌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이다. 거기에는 사유의 뜰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선뜻 시장으로 털고 나선다. 서울의 경우라면,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에 가면 들어설 자리조차 없이 사람으로 혼잡을 이루고 있지만,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싱싱한 생의 열기가 충만해 있다.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진지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가를 한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런 ‘민정의 견학’은 내게 새로운 사유의 뜰을 열어준다.

    광장과 뜰은 다르다. 광장에는 군중의 집회만 있지, 사색의 여백은 없다. 요 근래의 광장에서는 누런 정치의 냄새만 풍긴다. 그러나 뜰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사적(私的)인 생활의 푸른 여백이다.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저마다 생각의 공간을 지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 사유의 뜰이 없다. 아쉬운 일이다.
(83. 5. 17)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