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불교계의 원로스님들이 많이 입적했다. 그대마다 든든하게 둘러쳐진 울타리가 무너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아무 스님이 어떤 산에 계시거니 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든든했고, 이따금 찬아 뵙고 가르침을 받을 때면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새로 열린 듯하여, 스승의 존재에 대해서 그지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은 어디서나 만나기 쉽지만, 지혜를 일깨워 사람을 만들어 주는 스승은 참으로 만나기가 어렵다.

    요즘의 학생들은 버릇이 없다고 자주 듣는다. 산에서도 가끔 겪는 일이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사가 거의 없다. 이 시대가 서론도 결론도 없는 생략의 시대인 줄은 알지만 인간의 사이가 너무 삭막하다. 여기서 지적한 인사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라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예절을 뜻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맞은편 의사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을 성급히 쏟아버리려는 경향이 짙다. 대화란 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주고받는 인간끼리의 이야기다. 뜻이 같은 사람끼리는 굳이 대화가 필요치 않다. 날씨 이야기를 한다든지. 이번 주말에 어디를 갈 것인가, 혹은 뉴스시간마다 나오는 똑같은 얼굴에 대한 이야기쯤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입장과 뜻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리를 같이하여 맞은편의 눈매와 음성과 얼굴표정도 함께 읽으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함으로써 막혔던 오해가 풀리고 이해의 통로가 열릴 수 있다. 내 뜻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 입장과 같지 않다고 해서 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자유로워지려면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 혹은 종교에까지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정이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

    남의 스승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뭣보다도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논어]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옛일을 되새겨 새 것을 살필 줄 알아야 스승될 자격이 있다는 말을 상기해 봄직하다. 이미 굳어진 낡은 자를 가지고 나날이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새사람을 재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학생은 많아도 제자는 드물고, 선생은 많아도 스승은 귀하다고 한다. 물론 아무나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그만한 믿음이, 전 생애를 걸 만한 신뢰감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스승이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 혹은 기술의 전달자가 아니다. 제자가 지닌 좋은 덕성과 잠재력을 불러일으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끝없는 관심을 가지고 지키고 보살피고 때로는 채찍질까지도 아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제자로 하여금 스승의 새로운 분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제자를 통해서 스승은 거듭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제자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믿고 따라면서도 스승의 모방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의 매개체인 그 스승을 통해 지적인 욕구를 채우면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스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승에게 붙잡히면 복사품이나 모방자이지, 그 스승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다. 스승의 경지를 딛고 일어서 한걸음 앞서야 비로소 그 스승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설익은 에고의 벽에 갇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제자가 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학생으로 겉돌고 만다.

    옛날의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이 진리를 깨우쳐 주고 업을 이어주고 온갖 의혹을 풀어 주었다. 요즘처럼 수많은 학생들을 한방에 모아 놓고 강의가 아닌 경연을 해야 하는 상황 아래서는 예전의 도제교육과 같은 사제간의 관계는 사실상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그 정신만은 오늘날에도 이어받아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해인사 백련암으로 성철 종정스님을 뵈러 갔었다. 올해 73세인데도 수행자로서의 기상은 전이나 다름없이 팔팔하시다. 스님과 마주하고 있으면 기운이 솟는다. 그대 무슨 이야기 끝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신의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스님이 행각하던 시절, 만공(滿空) 스님에게 스승인 경허스님을 어느 정도로 믿느냐고 물었다. 경허스님은 1849년에서 1912년까지 생존한 근세 한국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선사로, 그 문하에서 만공, 혜월, 한암 같은 뛰어난 선승들이 많이 배출됐다.

    그대 만공스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가령 둘이서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허기에 지쳐서 쓰러져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 ‘스님(경허선사를 가리킴)은 더 사시면서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니 저를 잡아 자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하고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겠다는 것. 스승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 더 할 말이 없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종정스님은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그 스승은 능히 잡아먹을 사람이고, 그 제자는 능히 잡아먹힐 사람이라고.

    선사들의 직설적인 말이라 그 비유가 좀 거칠긴 하지만, 스승과 제자간의 신의가 전생명력을 기울인 그것임에 전해 듣기에도 숙연했다.

    우리 대학이 자율화될 거라고 한다. 대학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도 반가운 봄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대학의 문제는 곧 우리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부당국은 체제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지나친 공권력의 개입으로 우리 대학은 대학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교수와 학생 사이는 사제간의 틀을 벗어나 서로가 불신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문화의 창조도, 국가발전의 원동력도 될 수 없을 것은 뻔하다. 새로운 전기가 이루어지려면 서로가 이해의 눈으로 끝없는 인내력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학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라면, 사회의 문제 또한 곧 대학의 문제일 수 잇다는 사실을 당국에서는 착안해야 한다. 무엇이 진리고 정의인가를 배우고 익히는 곳이 대학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경기를 유치할 만큼 우리 국력이 진정으로 신장되고 성숙되었다면 정치와 경제, 언론과 교육 등, 우리 사회의 모든 현상과 계층간의 관계도 그런 수준으로 성숙되어져야 할 것이다.

    봄은 누가 만드는가? 대지의 봄은 절기를 따라 저절로 오지만, 인간의 봄은 우리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올봄이 우리에게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난 기념할 만한 새봄이기를 빌고 싶다.
(84. 3. 10)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
 
 

  
2010.11.17 (00:20:36)
[레벨:8]누월재
 
 
 

제가 사는 이곳은 법정스님의 책을 구하기가 어렵지요. 그래도 책을 읽지않아도 그분의 향기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고 나에게도 왔음을 느낍니다. 스님의 말씀 한자락을 가슴에 간직하고 어려울때는 그 향냄새맡으며 살아가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