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눈병이 나서 조직검사까지 해가면 병원을 드나들 때 막막하게 육신의 비애를 느꼈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아버린 과보로 눈병을 앓는다고 여겨졌다. 눈이 나으면 이제는 시력을 아끼면서 사람으로서 꼭 볼 것만을 가려서 보리라고 다짐했었다.

    물론 이런 다짐은 아쉬울 때뿐으로 이내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라나 눈이 피로할 때면 문득 되살아나는 다짐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감각기관은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잠시도 쉴 여가가 없이 둘레로부터 극심한 자극을 받아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 중에도 우리들의 눈과 귀는 바야흐로 영상시대를 맞아 줄곧 혹사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에 변산반도 쪽을 행각한 일이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월명암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서해의 일몰은 눈보라에 가려 볼 수 없었지만, 이튿날 아침 첩첩이 쌓인 산봉우리 위로 솟아오르는 일출은 장관이었다.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직소폭포를 거쳐 내소사로 내려왔다. 변산의 암벽들은 설악산처럼 날이 서지 않고 뭉실뭉실 아주 덕스러워 보였다. 부안의 인심이 좋은 것은 이런 자연환경에도 연유가 있을 것 같다.

    내소사에서 고창 선운사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다. 줄포에서 차를 기다리느라고 정류장 가까이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자리에 반쯤 들어찬 사람들이 비디오 쪽에 시선을 모으고 엄숙하게 앉아들 있었다. 뭔가 싶어 쳐다봤더니, 흙먼지가 이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옷을 한 꺼풀씩 벗는 미국산 도색영화였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이내 나오고 말았지만, 이런 시골에까지 이 지경이 됐는가 싶으니 한심스러웠다. 이 근방 출신 한 시인의 글에 ‘해일’이 있는데, 그 다방 풍경은 한 낮의 해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뒤 들어서 안 일이지만, 요즘은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다방마다 거의 비디오 시설을 갖추고 있어, 이전의 음악 대신 그런 영화를 백주와 심야로 돌린다는 것. 전에 엇던 새 시대의 새 모습이다. 산골에서 사는 중이라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뒤늦게 안 것이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타고 간 고속버스에도 비디오 장치가 있어 상태도 안 좋은 필름을 시끄럽게 틀어댔다. 이제 우리는 여행의 조촐한 즐거움도, 좀 쓸쓸하고 허전한 그 여백 같은 것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어디로 가나 시끄럽고 울긋불긋한 영상 때문에 우리들의 얼은 멍들어간다.

    활자 매체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읽다가 싫으면 덮어 버리면 그만. 그러나 영상매체는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다. 들려주는 대로 바보처럼 멍청하게 앉아서 들여다볼 뿐이다. 그러니 다스리는 입장에서는 끌고 가기가 훨씬 쉬워진 것. 그때그대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물감을 풀어 놓으면 우르르 몰려들어 얼을 빼어주기 때문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영상의 조작에 의해 얼마든지 시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말썽이 되고 있는 청소년의 범죄만 하더라도 어디 우연한 일이겠는가. 수사당국의 집계에 따르면 그들 범죄 유발의 자극이나 수법은 TV나 비디오 등 저질 영상매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비율이 지배적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이 저질문화권 안에서 배우고 본받을 게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릇된 성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인들의 음흉하고 뻔뻔스럽고 무감각한 타성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늘고, 국제적인 운동경기를 벌여 국위가 선양되고, 생활에 편리한 가전제품들이 방마다 그득그득 쌓인다 할지라도,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삶의 질’이 도외시된 그 어떤 제도나 정책 혹은 문화도 가치 부여를 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잘 쓰면 얼마든지 창조하고 형성하면서 한없이 향상할 수 있지만, 같은 능력이라도 잘못 써 버릇하면 자기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도록 끝없는 구렁으로 떨어져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실현하면서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과 관계가 멈출 때 사람은 곧 늘고 병들어 버린다. 우리들이 잘 아는 헬렌 켈러 여사. 앞 못 보는 그가 ‘사흘 동안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첫째 날에는 삶의 보람을 느끼도록 해 준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친구들 속에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싶다는 것. 오후에는 서늘한 숲속을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에 듬뿍 채운다. 그리고 황홀한 저녁놀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날 밤 그는 한잠도 이룰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바뀌는 기적을 맞이한다. 잠든 대지를 깨우는 햇빛의 장엄한 광경을 경건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날은 이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두로 살펴보는 데에 시간을 바친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다. 밤에는 영화관이나 극장을.

    셋째 날은 열심히 일하면 사라가는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면 행복할 것이다. 진지한 결단의 표정 앞에서는 인간의 긍지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런 모습을 보고는 연민의 정을 품을 것이다. 마지막 날 저녁에 또 다시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인간의 정신이 한낱 우스갯짓으로 물들어 버릴까봐 겁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끝으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눈이 먼 사람이다. 눈먼 내가 눈이 멀지 않은 당신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잇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눈을 사랑하라. 눈만이 아니다. 귀가 먹어 버리고 벙어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니 신비로운 자연이 마련해 준 여러 가지 접촉을 통해, 세계가 당신에게 보여준 즐거움고하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확신한다. 볼 수 있다는 이 시력이야말로 모든 감각 중에서도 가장 값지다는 것을.“ 흔히 우리는 눈을 가지고도 볼 줄을 모른다. 고마운 시력을 형편없는 데다 쏟아버리면서도 뉘우칠 줄을 모른다. 당신의 눈을 사랑하라.
(84. 4. 10)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