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가까이 신문도 보지 않고 방송도 듣지 않았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이나 지장이 없었다. 이따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바깥에서 밀려드는 소리를 막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기본적인 사유를 이어갈 수 있다. 펼쳐보았자 만날 그렇고 그런 우울한 소식들이고 귀 기울여 들어도 밤낮 똑같이 한심스런 소리뿐이니까.

    그러지 않아도 복잡하고 시끄럽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달갑지도 않고 덕이 될 것도 없는 그런 잡다한 소식과 정보까지 삶의 터전에 불러들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사실 이런 잡문까지도 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경이지만 ‘마음 약해서’ 할 수 없이 다시 쏟아놓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요긴하지도 않은 그 많은 정보와 지식 때문에 인간 자체가 형편없이 얼룩지고 시들어가는 형편이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처지에서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시대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정의사회와 복지사회 건설을 내세우고 일어선 이 시대. 정의와 복지는 그만두고라도 전에 없던 해괴망측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무슨 소식일까.

    세상일은 그 어느 한 가지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당국에서는 대화의 통로를 억지로 막아 버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당국의 눈치만 살피면서 일을 순리대로 풀어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쌓이고 쌓인 응어리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 폭발하게 되는 것은 우주질서요 물리현상 아니겠는가.

    어느 특정한 나라를 지적할 것 없이 통치자들은 ‘3S 정책’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다. 대중에게 섹스, 스포츠, 스크린(혹은 스피드)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골을 비게 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와 현실 인식에 무관심을 빚어내어, 지배자가 마음대로 조작하도록 하는 이른바 우민정책(愚民政策)이다.

    요 몇 해 사이 낱낱이 지적할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는 음란한 행동거지들이 멋대로 범람하고 있다. 공영방송에서 조차 공공연히 그런 화면을 내보내고 있을 정도니까. 시민들의 의식이 마비되었는지 그전 같으면 들고 일어날 만한 일인데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고도 어떻게 청소년의 성범죄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유흥업소가 밀집되어 잇는 서울의 영동이 이 땅의 소돔과 고모라라는 말은 나돈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우리들의 감각이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예절과 양식만은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한 동방예의지국 후예의 체면쯤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또한 우리들 자신이 바로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환경과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들의 환경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내면적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외부적인 과시와 권력과 소유물과 쾌락에 탐닉하기 쉽다. 우리들의 감정이 공허할 때 우리는 물건을 수집하고 쾌락에 빠져든다.

    인생은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넓고 길어질 수 있다. 아직 겪어보지 못한 진실과 아름다움이 우리들 안에 묻혀 있다.

    하루 한때라도 자기 자신을 투철히 응시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기가 인간으로서 지금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자신의 능력을 값있는 일에 쓰고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는 일에 탕진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그런 기회가 없으면 범속한 일상성에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들이 건강할 때에는 죽음을 잊어버린 채 곧잘 딴눈을 팔면서 지내지만, 죽음 쪽에서는 한순간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언제 어디서 불쑥 그 얼굴을 내밀지 알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도 그렇듯이 죽을 때에도 혼자서 죽는다. 그만큼 외로운 존재다. 그러니 살아 있을 동안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기 능력과 잠재력을 보람 있는 일에 마음껏 쏟아야 한다. 어떠한 쾌락이라 할지라고 우리를 언제까지고 즐겁게 해주지는 못한다. 관능적인 쾌락에는 더욱 큰 자극이 요구되고 남용이 되풀이되면 마침내 중독 상태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요 죽음이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절제와 자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은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이해가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부패하고 만다.

    근래에 와서 우리는 또 너무 조급히들 서두르고 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혹은 집안에서까지 허둥지둥 서두르고 있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이 어쩐다 하면 하루아침에 우르르 쏠리고 만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허약하게 되었는가.

    공사기간을 서둘러 단축하는 공사치고 온전한 것 보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값싼 가격으로 완공했다고 자랑하던 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얼마 못 되어 곧바로 보수에 들어갔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모든 일에는 시간과 순서와 공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식당 같은 데서 밥 먹는 풍경을 한 번 지켜보라. 조금만 늦어지면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음식을 보면 그저 쫓기듯 게걸스럽게 담아 넣는다. 그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고 할 수 없다.

    고속버스 휴게소에서는 점심때인데도 쉬는 시간은 단 10분. 차에서 내리면 비좁은 자리에서 굳어진 팔다리를 풀기위해 기지개 좀 켜고, 듣고 싶지도 않은 스포츠 중계를 듣느라고 멍해진 머리도 좀 털고, 담배 연기로 답답해진 숨도 크게 쉬고, 화장실을 거쳐 식당에 들어가 주문하고 기다리고 하다보면, 실제 먹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 4분밖에 안 된다. 그러니 게걸스럽게 긁어 담을 수밖에 없다. 올림픽에 이런 경기종목이 있다면 선수촌에서 따로 훈련을 거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단연 금메달감일 것이다.

    이래서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소화제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민이 되었는가.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도 식사시간은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음식을 대했을 때 그 맛을 차분히 보면서 사람의 의젓한 품위도 좀 갖추어야 할 것 같다.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선진주곡의 국민이라고 남들 앞에 명함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다들 어디를 향해 가느라고 하나같이 바삐 바삐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물을 것 없이 우리들의 종착지는 묘지 아니면 화장터이다. 무슨 일이건 서두르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생각을 모으면서 차근차근 해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가 적다.

    우리가 지금 어느 장단에 놀아나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84. 6. 13)
글출처 : 물소리 바람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