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세상 돌아가는 꼴이 재미없어 방안 일에 마음 붙이려고 도배를 했다. 이 산으로 옮겨온 후 꼭 5년 만에 다시 도배를 하게 된 것이다. 일 벌리기 머리 무거워 어지간하면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고서(古書)에서 생겨난 좀이 많아 한지로 바른 먹이며 천정의 모서리를 볼품사납게 쏠아놓아 할 수 없이 다시 발랐다.

    창호로 스며드는 햇살이 한결 포근하다. 이따금 바람에 파초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어느 바닷가 모래톱을 쓰다듬는 물결소리로 들릴 때가 있다. 요즘 새벽이면 하얀 달빛이 뜰에 가득 넘친다. 지난 여름부터 줄곧 흐린 날씨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그 달빛. 텅 빈 산을 홀로 지키고 있을 때의 그 홀가분하고 넉넉한 내 속뜰의 빛이 이럴까?

    말게 개어 풀잎마다 이슬이 보석처럼 빛나는 싱그러운 아침. 앞산에는 산그늘의 내리고 뜰에는 찬 그늘이 내리는 해질녘의 한때, 고독과 정적(靜寂) 속에서 내 산거(山居)는 선열(禪悅)로 충만하다. 꽃처럼 부풀어 오른 이런 순간을 나는 아무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인생의 화폭에 넓은 여백을 지니고 싶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태평성세만이라면 우리 이웃들이 다 같이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루 한때라도 이런 순간들을 누릴 수만 있다면…….

    밤이 깊도록 [사기(史記))]를 읽다가 오동잎 지는 소리에 놀라 귀를 모을 때가 더러 있다. 오동잎 지는 소리에 놀라다니. 저건 뜰 가에 서 있는 오동나무의 잎이 이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지는 소리가 아닐 거다. 어느 한 인생이 이 한 많은 인생을 하직하는 소리일지 모른다. 애증(愛憎)으로 뒤얽힌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혼이 되어 지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일는지도 모른다.

    지난 여름부터 이 가을에 들어서까지 나는 이른 아침과 밤을 제외한 시간의 대부분을 불쑥불쑥 찾아드는 방문객들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안 찾아올 순 없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발길이 잦을 때 참으로 짜증스럽다. 이래서 옛 선사들은 한군데 오래 머물지 말라고 했던가. 이곳도 이제는 인연이 다해가는가 싶다.

    얼마 전 선종사(禪宗史)를 읽으면서, 사람을 피해 한평생을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던 9세기의 선승 법상의 자취가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진다. 그는 자기 스승 마조 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마음이 곧 부처니라(卽心卽佛)’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다.

    지혜의 눈이 열린 그는 이제 더 스승 곁에 있을 필요가 없어 그길로 대매산이라는 깊은 산에 들어가 초암(艸庵)을 짓고 홀로 살면서 좌선을 한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게 있는가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 때문에 참으로 닦을 수가 있는 것. 범이 날개를 달려는 닦음이다.

    그는 잣나무 열매를 따먹고 연못에서 자란 연잎으로 옷을 엮어 입었다. 좌선을 할 때는 여덟 치 높이의 쇠로 만든 탑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관(冠)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로지 졸지 않기 위해서, 꾸벅 졸면 탑이 머리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의 선승(禪僧)들은 이런 기행(奇行)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가 20여 년 전 해인사 퇴성당에서 지낼 때에도 어떤 스님은 끝이 날카로운 송곳을 자루를 길게 만들어 턱밑에 대고 좌선을 했었다.

    산문(山門) 밖 세월이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스님이 그 산에 들어가 지팡이감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끝에 그 초암에 이른다. 더벅머리에 풀 옷을 걸친 은자(隱者)를 보고 그는 묻는다.

    “스님께서는 이 산에 들어와 산 지 몇 해나 되셨습니까?”

    “둘레의 산이 푸르렀다가 누우래졌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

    산중무일력(山中無日曆), 깊은 산속에 달력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수행승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항상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흘러가는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 길을 잃고 헤매던 그는 나갈 길을 묻는다.

    “산을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흐름을 따라가게(隨流去).”

    시냇물을 따라가면 마침내 산을 벗어날 수가 있다. 어디 손속에서뿐이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다 앞이 꽉 막혔을 때 우리들은 절망한다.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옴짝 못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흐름을 따라간다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산을 내려온 그는 자기가 보고 온 이야기를 스승한테 말했다. 그 스승은 일찍이 마조 선사 문하에서 함께 지내다가 대매산에 들어간 후 소식이 묘연한 선승 법을 생각, 그 사람을 다시 보내 하산을 권했다. 법상은 내려오지 않고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한 연못의 연잎으로 걸치기에 모자람이 없고
몇 그루 잣나무 열매로도 먹고 남았네
함부로 세인에게 거처가 알려졌으니
풀집을 옮겨 더 깊은 데로 들어가노라
    법상의 소식을 전해들은 스승 마조는 곧 한 제자를 대매산으로 보내어 그를 찾게 한다.

    “스님은 이전 마조 선사를 뵈었을 때 무슨 도리를 얻었기에 이 산에 숨어 사십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곧 이곳으로 오게 된거지.”

    “선사는 요즘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가르칩니다.”

    이때 선승 법상은 내뱉듯이 말한다.

    “그놈의 늙은이가 사람을 홀리고 있군. ‘비심비불’이라 하건 말건 그것은 내 알 바 아니야.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이니까.”

    이 말을 전해들은 마조 선사는 감탄한다.

    “매실(梅實)이 잘 익었구나!”

    매실이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대매산의 법상을 가리킨 말.

    이때부터 법상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큰 절이 지어지고 거기서 6, 7백 명의 수행승들이 살았다. 그가 88세로 죽을 때 제자들에게 남긴 말은 지금까지도 승가에 전해지고 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來莫可拒 往莫可追).”

    사람을 피해 산속 깊이깊이 들어가 살던 그의 입에서 오는 사람을 막지 말라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열매는 일을 대로 익은 후에야 비로소 열매의 구실을 할 수 있다. 익기 전에는 열매일 수 없기 때문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 때로는 높이높이 봉우리 위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으로 잠기는 것이 수행자의 길이다.

    요즘의 나는 정말이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사람을 만나서 반갑지 않을 때는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고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사람은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고 그러는 기다림과 자기 정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요즘의 심경으로는 없는 듯이 살면서 하고 싶은 공부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

    내일은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에 나가 이 편지를 부쳐야겠다.
(80. 12)
글출처 : 산방한담 中에서.....

譯註
영원한 청춘의 도시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김준태 시인이 5·18민주화운동 직후 지방 일간지에 발표한 시의 한 대목이다. 이 때문에 해당 신문은 폐간되고, 그는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이후 무등산은 고은·김남주·황지우·문병란·양성우 등에 의해 저항문학의 단골 소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