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스레 되돌아 보이는 마루턱에 올라선 것이다.

   마르틴 부버가 하시디즘(유태교 신비주의)에 따른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가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 내어 읽어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12월이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받았는지, 자식들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기계적인 무표정한 인간으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덕지덕지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게 된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지난 10월 중순에 겪었던 일이다. 흙벽돌 찍는 일로 오후 늦게 이천에 있는 이당 도예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은 맑게 개인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방금 해가 넘어간 뒤랄 도로의 차들은 미등을 켜고 달리는 그런 시각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 그 하늘빛이 너무 고왔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석양의 투명한 빛이 산자락과 능선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 산의 능선이 마치 우주의 유장한 율동처럼 느껴졌다. 언뜻 보니 산등성이 위에 초이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능선 위에 펼쳐진 하늘빛은 고요와 평화로 물들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노을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어둠이 내려 이제는 산의 윤곽도 검게 굳어져 초승다의 자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어린애 눈망울 같은 초저녁별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언뜻언뜻 이런 풍경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서쪽으로 달려온 길이, 그날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자연은 이토록 아름답다.
자연은 실로 신비롭다.
주어진 이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일상의 우리는 그저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름다움과 신비를, 그런 고요와 평화를 우리는 한 생애를 통해서 몇 번이나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가.

   우리들의 감성이 여리고 투명하던 시절에는 길섶에 피어있는 풀꽃 하나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부면서 그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에 감동을 하곤 했었다. 하루해가 기우는 해질녘의 노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싶도록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이제 막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 식구들을 불러 달을 보라고 소리치기도 했었다.

   이 글에서 내가 시제를 굳이 과거형으로 ‘했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 앞에 무감각한 생물로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활형태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혹은 정보사회로 치닫고 있을수록,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는 우리네 삶을 떠받쳐주는 주추가 되어야 한다. 나라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세상이 온통 부정과 비리와 폭력과 살육으로 뒤범벅이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등진 비인간적인 현대사회의 질병이다.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일인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한마디로 가릴 수 없는 복합적인 사항이지만, 사물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느낄 수 있다면, 오늘처럼 황량하고 살벌한 ‘인간 말종’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 삶이 터전에 우리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 쉬어 가고자 한 손님인 철새들에게 함부로 총질을 해서 무참하게 살육을 일삼는 사람을 어떻게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가친척을 거느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목숨을 지닌 생명체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무고한 들짐승들을 덫이나 올가미로 마구 잡아 멸종시키고 있는 이웃을 어떻게 사람의 대열에 세울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새와 들짐승 같은 자연의 친구들이 사라지고 나면 생물이라고는 달랑 사람들만 남게 되리라. 그때 가전제품과 쓰레기와 자동차와 매연에 둘러싸여 있을 우리들 자신을 한번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생물이 아닌 괴물일 것이다.

   감상과 감성은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다라다. 인간이 인식능력인 감성(感性)이 마비된다면 그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일 수가 없다. 대상에서 받은 느낌으로 마음 아파하는 일을 감상(感傷)이라고 하는데, 감성이 무디어지면 감상의 기능도 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앞에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것은 생물이 아니다.

   경제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속뜰인 그 감성이 메말라간다.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