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이 산골짜기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댔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도록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여기저기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창문을 가렸던 비닐이 갈기갈기 뜯겨 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궁이에 제를 쳐내는 데 쓰는 들통도 개울가에까지 굴러가 있었다. 대단한 바람이었다.

   내일 모레가 우수(雨水)인데 사나운 바람이 부는 걸 보면, 겨울이 봄한테 자리를 내주고 물러갈 날도 머지않았다 보다.

   바람은 왜 부는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인 바람은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는 기능을 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건 바람일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나름으로 움직이고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도 움직이면서 안으로 끊임없이 수액을 돌게 한다. 해가 뜨고 지는 거나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도, 해와 달이 살아 있어 그런 작용을 한다.

   우주의 호흡과 같은 이런 움직임과 흐름이 없다면 사람 또한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멈추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멈춤과 고정됨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러니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움직임과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서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요란하다. 거액의 대출을 둘러싼 비리와 부정이, 우리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처럼 야단스럽다. 정치권력과 재력이 한데 어울려 빚어놓은 부정과 비리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뭔가 그전과는 좀 달라질 것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달라지기는 고사하고 갈수록 태산인 그 혼미 앞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믿었던 도끼에 발을 찍히는 배신감마저 느껴야 한다. 국가기관과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환멸 또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정도가 이제는 극에 달한 듯싶다.

   우리는 요 몇 해 사이를 두고 끊임없이 이런 비리와 부정 앞에 국민적인 긍지와 나라의 체면을 여지없이 짓밟혀 왔다. 그런데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이와 같은 비리와 부정 앞에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기이한 현실이다. 모두가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고만 발뺌을 하고 있다.

   책임질 사람이 없는 사회에 우리가 몸담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위태로운 삶인가.

   한때 경제적인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겠다고, 세계 일류국가를 이루겠다고 벼르고 장담하던 국가적인 의욕과 국민적인 희망은 1997년 2월 현재 그것이 허구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실체를 잘못 인식하고 떠들어댄 정치꾼들의 선전에 지나지 않은 허세였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모든 것은 되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지려는 그 과정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그 어떤 비극적인 상황 아래서라도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이 곧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건 안 하는 사람이건 가릴 것 없이 요즘 입만 열었다 하면 모두가 하나같이 불경기와 불황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울적하고 어두운 표정들을 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영역이 불경기이고 불황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경제적인 현상이 곧 인간의 전체적인 생활현상과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인간생활에는 경제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이밖에도 경제 외적인 현상이 다양하게 있다.

   앞서 살다 간 우리 선인들은 경제 외적인 현상을 통해서 넉넉지 않았던 경제적인 현상을 무난히 극복하면서 사람답게 살줄을 알았다.

   그동안 우리가 생명을 기르고 지탱해 주는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면서 흥청망청 너무 과분하게 살아 왔던 자취를 이 불경기와 불황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 온 날들이 우리들 분수에 알맞은 삶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루하루 우리의 살림살이가 내 자신과 이웃에게 복과 덕을 심는 것이었는지, 그 복과 덕을 탕진하는 것이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의 고리다. 오늘의 불경기와 불황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비리와 부정, 혼란과 혼미는 외부세계에서 주어진 짐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순간순간 뿌려서 거둔 열매다.

   어떤 작용이 있으면 거기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작용은 그것을 지탱하는 반작용이 필요하다. 작용은 양극이고 반작용은 음극이다.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쇠붙이인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가는 것은 거기 공기의 반작용(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비행기는 공중에 뜰 수 없다. 새들이 공중은 나는 것도,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을 치는 것도 이런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 혼란과 혼미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같이 곰곰이 생각해 볼 과제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스승은 대답한다.

   “어지러운 이런 세상이야말로 진짜 좋은 세상(好時節) 아닌가?”

   무사 안일한 태평세월보다는 차라리 난세야말로 그 저항을 통해서 살맛나는 세상이란 말일 것이다.

   세계 일류국가를 이루겠다는 허황하고 촌스런 꿈을 꾸기 전에, 그 사회 구성원이 상처받지 않고 활기차게 기를 펴고 살 수 있도록 염원해야 한다. 사회나 국가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 즉 정부 관료와 정치인과 기업인 등 그리고 당신과 내가 지닌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사회적인 변혁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당신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당신의 ‘속사람’도 불황을 타는가?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