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더위와 물 것 때문에 멀리했던 등불이 가을밤에는 정다워진다. 맑은 바람 불어오고 청랭한 기운 감돌면 풀벌레 소리 곁들여 등불을 가까이하게 된다.

   호수나 시냇물도 가을이 되면 드높게 갠 하늘을 닮아서인지 보다 말고 투명해진다. 우리들의 심금(心琴)도 잘 조율된 현악기처럼 슬쩍 스치기만 해도 무슨 소리를 낼 것같이 팽팽하다. 가을은 이렇듯 투명한 계절이다.

   선들선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문득 나그네 길에 나서고 싶어진다. ‘바람’이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만을 가리키지 않고, 마음이 글리어 들뜬 상태를 바람이라고도 표현한 우리말의 묘미는, 우리 한국인의 감성을 잘 드러낸 것이다.

   저녁나절 햇볕이 밝게 드는 창 아래서, 16세기말 시문(詩文)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의 문사 도융의 여행기 <명료자유(冥廖子遊)>를 읽었다. 도융은 운치 있는 생활의 취미를 기술해 놓은 <고반여사(考槃余事)>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풍류인이다.

   <명료자유>는 여행의 멋과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가르쳐준 글이다. 여행이란 곧 방랑을 뜻한다. 방랑이 아닌 것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여행의 본질은 그 어떤 의무도 없고 일정한 계획도 없고 편지도 없고 호기심 많은 이웃도 없다. 환영회도 없고 정해진 목적지도 없는 자유로운 나그네길이다.

   훌륭한 나그네는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지신의 성이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정적 속에 살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일이 없고, 시끄러운 장바닥에 있으면서도 소란스러움을 모른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명료자유>를 읽으면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여행에 대해서 크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관광은 있어도 진정한 여행은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미리 짜여진 일정표에 의해서 관광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낯선 사람들끼리 떼 지어 몰려다니면서 사진 찍고 물건 사는 것을 여행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동차와 속도에 길들여지고 시간에 쫓기면서 인간적인 ‘걸음(步行)’을 잃어가고 있다. 걸음은 그 속에 건강과 사색과 즐거움과 눈(안목)을 갖추고 있다. 항공기와 기차와 선박과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오늘날의 여행은 자신의 발로 뚜벅뚜벅 걸어 다니던 예전의 도보여행과는 그 상황이 전혀 다르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수많은 것을 대하고서도 정작 여행의 알맹이인 자아 발견이나 자기 탐구는 없이, 자랑거리와 가벼워진 지갑과 청구서만 가지고 지쳐서 돌아온다.

   여행은 떠날 때의 그 설레임부터 시작된다. 이것저것 준비를 하면서 들를 곳을 헤아린다. 대개의 경우 목적지만을 염두에 두고 그곳만을 향해 허겁지겁 일로매진하느라고 그곳에 이르는 과정을 소홀히 여기는 수가 많다. 그러나 좋은 여행은 목적지보다도 그 과정과 도중에서 보다 귀한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여행뿐 아니라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물으면서 탐구하는 그 과정에서 보다 값진 인생을 이룰 수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안에서 고마움과 기쁨을 찾아내어 누릴 줄을 알아야 한다.

   여행은 집을 떠나 밖에 나가 있는 기간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집에 돌아와 밖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차분히 음미하면서 현재의 삶을 알차게 가꾸어 나감으로써 여행의 의미는 여물어 간다.

   독서는 그 책을 쓴 저자에 의해서 우리 생각이 이끌려가기 쉽지만, 여행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한 그 체험으로 자기 자신을 채워 간다. 그러므로 여행은 독서보다 몇 갑절 삶을 충만하게 가꾼다.

   여행은, 즉 나그네 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혼자서 홀가분하게 나서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단 하루가 됐든 이틀이 됐든 일상적인 관계의 끄나풀에서 벗어나 자신의 그림자만을 데리고 훨훨 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형편이 그러지 못할 때는 동반자가 필요한데 그 동반자를 잘 택해야 한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도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누구나 겪어서 알고 있겠지만, 취향과 기질이 같지 않은 동반자와 길을 함께하게 되면, 모처럼 떠나온 나그네 길인데도 날개를 펴보지 못한 채 무거운 갈등의 짐만 잔뜩 짊어지고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옛 성인도 말씀하셨듯이 ‘차라리 혼자서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한때로 끝나지만 한 생애의 동반자인 그 ‘짝’을 잘못 만나면 평생을 두고 무거운 멍에를 져야 한다. 이와 같은 깨우침은 내 자신도 한때의 나그네 길에서 터득한 교훈이다.

   운수야인(雲水野人)으로 자처한 명료자는 행복을 얻는 비결은 즐거움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고 알맞게 그칠 줄 아는 데에 있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알맞게 그칠 줄 안다면 우리들의 삶은 넘치지 않고 신선할 것이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표주박 하나에 옷 한 벌로 가고 싶은 곳은 아무 데나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문다. 어느 곳에서 자더라도 주인의 일은 일체 묻지 않고, 그곳을 떠날 때에도 내 신분을 밝히자 않는다. 추위 속에 떠나도 외롭지 않고 시끄러운 무리 속에 섞여도 그 때문에 내 마음은 물들지 않는다. 그러니 내 방랑의 뜻은 단순한 떠돌이가 아니라 도를 배우려고 하는 데 있다.’

글출처 : 오두막 편지(法頂 스님, 이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