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하므로 성인은 겉에는 갈포를 걸치고

속에는 옥을 품는다.

 

  흔히 겉은 눈에 보이지 않은 안의 내용을 드러내는 수가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의 외화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그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성인은 겉으로는 남루해도 마음에는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겉만 보고 속까지 섣부르게 예단해서는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늘에는 비를 가득 품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니 집 안 구석구석에 눅눅한 습기가 형체도 없는 유령처럼 떠돌지요. 집 앞뒤 산의 골마다 흰 물안개가 골을 타고 이동합니다. 태정이네 고추 밭에는 고추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훈련병처럼 대오를 이루어 서 있고 무성한 잎과 녹색 고추들을 잔뜩 매달고 있지요. 성이 잔뜩 난 고추는 입천장을 벗겨낼 듯 맵겠지요.

 

 

  혼자 집에서 일하는 날은 늘 점심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끼니때만 되면 어김없이 저 혼자 그르렁거리는 위장이 뻔뻔하고 밉살스럽기조차 하지요. 혼자 밥 먹은 일은 신명나는 일이 아닙니다. 대개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르고 이른 저녁을 먹기도 하는데, 그런 날은 오후 네 시가 넘어가면 목이 쉬고 몸도 무거워집니다. 사람은 그렇게 성가시고 약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귀찮더라도 되도록이면 점심을 거르지 않으려고 하지요.

 

  서재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며 노자 한 구절을 입에 굴려봅니다. 우리에게 우환이 있는 까닭은 우리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이 없다면 어찌 우환이 있겠습니까? 노자는 자기 몸을 천하로 여기라고 일렀는데, 그렇다면 내 몸을 위해 한 끼니를 먹은 것은 천하를 먹이고 살리는 일이겠지요.

 

  오늘 점심은 콩국수를 먹으려고 합니다. 어제 저녁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시내 마트에 나가 20킬로그램 안성 추청미 한 부대와 토마토, 두부와 콩나물, 호박 두 개, 콩국수와 콩국을 사왔지요. 공도에서 공익 근무하는 둘째애가 돌아올 시간이라 휴대폰으로 마트에 나와 있다는 걸 알린 뒤 장 본 것들은 차에 실어 놓고 우산을 받은 채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여기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말하자 여자는 차를 태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요. 우산을 받고 있던 여자는 막연하게 시내 쪽을 가리켰습니다.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지요. 여자는 내 대답을 듣고는 우산을 받은 채 시내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일까요. 여자는 운동화를 신고 회색 반바지 차림으로 우산을 받고 서 있는 남자에게 그냥 한 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심심했을까요.

 

  국수를 삶아 채에 받쳐 찬물에 헹궈낸 뒤 계란 두 개를 삶고, 냉장고에 있던 오이 하나를 채 썰었습니다. 국수 위에 삶은 계란과 채 썬 오리를 얹고 차가운 콩국을 붓기만 하면 됩니다. 국수는 시간을 잘 맞춰 끓여낸 터라 부드러우면서도 꼬들꼬들하지요. 계란이 문제였습니다. 차가운 물에 식혀 계란껍질을 벗기는데 너무 일찍 꺼냈는지 계란은 반숙이 되고 말았지요. 노른자위가 액체 상태인 계란은 수저로 떠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콩국수에는 소금 간을 하지 않고, 대신에 짭짭한 밴댕이젓갈과 깻잎, 김치와 함께 먹지요. 속 좁은 사람을 일러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저는 밴댕이 속이 얼마나 좁은지를 알지 못합니다. 콩국수는 입에 달았지요. 평소 먹는 양보다 많지만 거뜬히 콩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습니다. 물 대신에 남은 콩국을 알뜰하게 다 마십니다. 후식으로 토마토 하나를 씻어 칼로 먹기 좋게 자른 뒤 하나씩 입에 넣고 오래 씹어 먹었지요.

 

  안성에서 콩국수 파는 집을 찾지 못했습니다. 콩국수를 좋아하는 터라 해장국집 유리창에 콩국수 개시라는 종이쪽지가 나붙어 두 번이나 찾아 갔는데, 콩국이 떨어졌다고 해서 두 번 다 허탕을 쳤습니다. 화장이 진한 주인여자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지요. 콩국수를 찾는 사람이 없는 건지, 콩국수가 별다른 이문이 남지 않는 음식이라 그런지, 콩국수를 안 파는 것이 분명했지요. 안성에서 콩국수를 먹으려면 집에서 해먹는 수밖에 없었지요.

 

 

  오후 들어 비는 그쳤습니다. 날씨는 후덥지근하네요. 마당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는 쇠뜨기 줄기에 물방울들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잔디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쇠뜨기는 뿌리가 깊고 잘 퍼져 천덕꾸러기  신세를 못 면하지요. 쇠뜨기는 뽑아내도 뽑아내도 여전합니다. 쇠뜨기만 죽이는 제초제도 나왔다고 하네요. 제초제까지 뿌려가며 쇠뜨기를 박멸할 생각은 없습니다. 새벽에 작은 물방울들을 머금고 있는 쇠뜨기들을 보면 쇠뜨기를 미워하는 게 올바른다 하는 회의를 갖는 것이지요.

 

  마당에서 나른한 몸을 풀다가 내친 김에 약수터까지 뛰어갔다 오기로 합니다. 말 잘 듣는 개 한 마리의 줄을 풀고 함께 가볍게 뛰어 약수터까지 올라갔다 내려옵니다. 길바닥에 여물지 않은 녹색 밤송이들이 떨어져 구릅니다.  약수터는 비어 있었지요. 얼마 뛰지 않았는데, 숨은 가쁘고 온몸에서 끈끈하게 땀이 배어 나왔지요. 30분 정도 도인 체조를하고 내려왔습니다. 대문 앞에서 우체부를 만나 의료보험 고지서와 잡지 한 권을 받았지요.

 

  내일 오전 라디오 녹음 대문에 작가 남애리 씨와 한 통화,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강의 문제로 박경은 씨와 한 통화, 그 뿐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집중해서 책 두 권을 끝까지 앍고 난 뒤 소파에 앉아 지압봉으로 발바닥을 누르며 글 쓸 걸 구상했지요. 등에 땀이 송슬송글 돋아 흘러내려갑니다.

 

 

글 철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