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대학교육이 이념, 혹은 목표의 하나가 그런 교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의 양성이었습니다. 첨단화된 전자문명의 물적 토대 위에서 모든 영역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정보와 기술의 상호교환의 세계화가 현실화된 지금 시점에서 대학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적 전문인의 양성이 주요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대개의 파시즘 독재국가들은 강압적으로, 이를테면 위협, 직장박탈, 체포, 수감, 고문 등과 같은 방법으로 입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거나, 혹은 정부 산하조직에 고용하고 각종 친정부 프로젝트 참가, 연구비지급 등의 명목으로 “돈과 자리”라는 미끼를 사용해 어용화해버려 자발적으로 입을 틀어막게 만듭니다. 그 의식의 자유롭지 않은 지식인이란 오래된 술이요, 갇힌 새입니다. 오래된 술이 삭으면 식초가 되고 갇힌 새는 성말라 비쩍 야위어가며 애처로운 소리를 냅니다. 

 

  얘기가 장황해지고 넓어져버렸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려는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자기가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하며, 거기에 효율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을 갖춰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수요자(학생들)들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 자발적으로 학습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드는 인격의 감화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걸 가르치는 자의 ‘덕성’이란 말로 뭉뚱그려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무릇 나서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는 마땅히 전문적 지식과 정보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가르치는 기계(조금 삭막한 명명법인가요? 들외즈와 가타리식으로 말하자면 도든 교사나 교수는 가르치는 기계가 됩니다)는 타성으로 학습의 자발적 수용자들을 훈육하고 제도해야 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데도 격이 있습니다. 단지 유식(有識)과 술(術)을 전수하는 것은 가르침의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그 대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방바닥에서 이루어지는 물산(物産)의 거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을 주고 유식과 술을 샀으나 다른 예(禮)가 없어도 크게 흠이 될 게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앞서서 만물의 덕(德)이 작용하는 앎(智)과 행(行)을 베풀 때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때는 마땅히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스승을 대하는 예(禮)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교육의 효과가 극대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배우는 –기계들은 배우는 자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우선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가 그것이고, 가르치는-기계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에 대해, 그가 거기에 이르기까지 바친 시간과 노고에 대한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갖춰야 합니다. 배우는 자의 궁극은 후생가외(後生可畏)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니, 앞의 파도를 더 큰 파도로 넘어가야 옳고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되 쪽보다 더 푸르러야 합니다. 무릇 배우는 자는 스승을 넘어서는 진경(進境)에 이름으로써 가르침의 지극함에 보은(報恩)해야 합니다.

 

  지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수강한 여러분 모두의 노고는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과중한 리포트를 빼지 않고 성실하게 수행한 학생들에게 보람을 갖는 것은, 여러 책을 읽고 리포트를 쓰는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향상의 흔적이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아직 평가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러분의 리포트를 읽으면서 어떤 텍스트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엉뚱하고(참신함!) 발랄한(자유로움)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내 기쁨은 더 커집니다.

 

  “누군가 달을 가리킬 대 어리석은 자는 손가락을 바라본다.” 이게 티베트 속담에서 나온 말이란 걸 근래에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손가락도 바라보고 그것이 가리키는 저 멀리에 떠 있는 달로 함께 바라보기 바랍니다.

 

 

글 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