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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혼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부자유하다는 것은 무엇에 얽혀 있다는 말이고, 어디에 메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기 밖의 타인이나 사물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들이 산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잘 산다는 말은 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벌써 부모와 관계를 맺은 것이고, 형제와 조산원과 화폐 같은 유통 수단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에는 모든 관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은 이러한 관계의 지속이다. 그런데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지극히 범속해지기 쉽다. 허구한 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생활 속에서 자기의 빛깔은 바래 가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도도히 흘러가는 타성의 흐름에 떠내려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분명히 내가 살고 있음에도 내 자신의 의지보다는 보이지 않는 바깥의 흐름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바깥의 흐름과 그 흐름에 묻어 있는 소음 속에 내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 외부의 소음은 내 자신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우리는 이침에 눈을 뜨기가 바쁘게 바깥의 소음이 밀려드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차가 달리는 소리,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전화의 벨소리, 서로 다투는 소리, 쇠가 쇠를 먹는 소리 ......., 한 말로 해서 이것들은 소음이다. 소음은 비단 음향뿐이 아니다. 대인 관계도 어떤 것은 따지고 보면 소음과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이 불필요한 나날의 가지들로 인해서 내 생명의 열매는 알차게 여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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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속한 일상생활에 대한 자각은 자기 자신의 뿌리를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없어도 좋아질 비본질적인 곁가지들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결단이 필요하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지금까지 얽혀 온 집착의 가지는 질긴 것이 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쯤은 참고 견뎌야 한다.

   물론 일상성 밖에 우리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상성에 긍정적인 의미가 주어지려면 심화(深化)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심화는 곧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매듭이다. 그 매듭은 누가 마련해 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가지치기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마련할 수 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자신을 본래적인 나로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한 '나'를 일단 객관화시켜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원초적인 인간의 물음 앞에 마주 서야 한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고독을 느낀다. 이 고독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상이 아니다. 벗들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는 대중가요조의 외로움이 아니다. 발가벗은 자신과 마주 서 있는 데서 오는 전율 같은 것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지평선 위에 드리우고 있는 당당한 실존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을 상기해 보자.

   "만일 네가 혼자 있다면 너는 완전히 네 것이다. 하지만 한 친구와 같이 있을 경우 너는 절반의 너다."

   이런 때 고독이란 정말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이러한 고독은 절망과 동질의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절망은 결코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 없다. 외부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신에게 눈뜨는 계기다. 이때 비로소 자기의 분수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결단하게 된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상태에서 오묘한 존재 혹은 오묘한 작용이 나올 수 있다.

   자신의 범속한 일상을 밑바닥까지 자각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눈이 뜨인다. 그래서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된다. 바깥소음에 가려 들을 수 없던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 할 일을 알게 된다. 새로운 사명감으로 그의 혼은 뛰고 있다. 사명은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니다. 내가 찾아서 스스로 수행하려는 '내 일'이다. 나의 모든 것이 오로지 그것을 위해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 그것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던짐으로써 오히려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명감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용기와 넘치는 힘을 부어 주는 생명의 줄기다.

   생명은 그 자신 안에서 발전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을 넘어 보다 높은 의미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열매로 변신하듯이.

   이때 비로소 이웃이나 모든 사물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의미가 내려지게 된다. 앞서 말한 주어진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제 그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한 되풀이가 아닌 심화의 새로움이 있다. 날마다 '새날'인 것이다.

   사람은 결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들이 산다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못 살아도 먼 후일에 가서 잘 사는 것을 뜻할 수는 없다. 하루하루를 삶의 보람을 누리면서 사는 데 그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조차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람은 저마다 개성과 취향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데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무슨 일에 있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이다.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꽃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의 종말이 명백하다 해도, 나는 오늘 능금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자기의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사람만이 발음할 수 있는 생명의 소리다.

1970. 5
글출처 : 영혼의 母音(법정스님,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