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던 레어리(Dun Laoghaire)는 바닷가의 작은 마을이지만,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이 있어서 여행자의 발길이 잦은 편이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해변을 딸 내려오는데, 한 노인이 바닷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시멘트 기둥 위에 낡은 베개 두 장을 얹어놓으니 훌륭한 야외용 의자가 되었다. 약간 더운 날씨였는데 노인은 군청색 양복을 입고 있다. 여기저기 좀이 슬거나 해진 양복을.

   돋보기안경을 끼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은 내가 오랫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는데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노인은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아일랜드가 배출한 제임스 조이스나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일까, 아니면 예이츠의 시나 베케트의 희곡일까. 수도사에 가까운 옷차림이나 근엄한 표정으로 보아 신학책이나 철학책일지도 모르겠다.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 파도 소리에 섞여 들릴 뿐이다. 그의 귀가 유난히 큰 것도 파도 소리를 많이 들어서일까.

   노인을 보고 있으니,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떠올랐다. 아마존 밀림에서 원주민과 함께 지내던 그는 어느 날 책의 매력에 눈뜨게 된다. 이후로 책 읽기는 고독이라는 짐승을 쫓아줄 유일한 방패이자 밀림과 문명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연애소설들은 죽은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인간이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연애소설을 읽는 평화보다는 아마존의 평화를 깨뜨리는 개발의 폭군들과 그에 저항한 싸움을 주로 그리고 있다. 밀렵꾼에게 새끼와 수컷을 잃은 암살쾡이와의 혈투 끝에 그가 돌아온 곳은 연애소설이 있는 오두막이었다.

   낡은 군청색 양복을 입고 책을 읽는 노인은 어떤 싸움에서 돌아와 여기 앉아 있는 것일까. 왠지 그의 책 읽기는 매일 그 장소에서 이어져 온 것 같다. 아일랜드의 외딴 바닷가에서도 그는 책을 통해 런던에도 가고 파리에도 가고 아마존에도 다녀왔을 것이다. 어떤 문장을 여러 번 소리를 내 읽었을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남은 페이지들을 다 읽을 무렵이면 이 바닷가에도 어둠이 밀려들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인생이라는 책을 고요히 내려놓을 날이 그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글출처 :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