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늙어 눈꽃으로 머리 덮이면 뒤편 산 중턱에는 자작나무가 무리져 있고 참나무가 많은 푸른 숲이있어 새소리가 들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이는 곳으로 마루에서 일어나면 강가에 흔들리는 억새꽃이 보이는, 당신과 둘만이 쓰는 조그마한 시골집이 있어야겠어요.

 

앞마당 너머로 텃밭이 조금은 있어야겠죠.

봄에는 꽃씨를 뿌려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야 하고 여름날 뒷마루에 앉아 누런 쌈장으로 더위를 한 움큼 싸서 먹을 시린 물보다 더 푸른 상추도 심어야겠죠.

 

겨우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먹으려면 무도 심어야 하고 초겨울이 되면 김장을 해서, 우리 내외도 먹고 친정에 찾아온 딸아이도 주려면 고소한 배추로 넉넉히 심어야겠어요. 그리고 한쪽으로 고추를 심어 가을날 앞마당에 멍석을 깔로 자식들 얘기 하면서 고추를 말리는 그런 집에서 당신과 살고 싶어요.

 

돌담 옆으로는 가을날 단풍이 들어 붉은 감으로도 멀리서 우리 집을 알아볼 수 있도록 감나무를 네댓 그루는 심여야겠어요.

시골 집 뒤편으로는 당신이 좋아하는 오지항아리도 서너 개 묻어 두어야 겠어요.

 

당신 친구가 오랜만에 오셔서 겨울밤이 깊어지도록 세상 밖 얘기 나누다 시장기가 돌면 어제부터 내린 눈이 정강이까지 쌓여 푹푹 빠지고, 독 안의 김치를 꺼내서 펄펄 끊는 가마솥에 국수를 삶아 비벼 먹으며 새벽이 창문 두드리는 것도 모르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졸음이 눈꺼풀에 내려오면 조금 진한 헤즐넛 커피를 마시며 학창 시절 미팅 때 만난 남학생 얘기로 깔깔대며 입 안을 헹구고, 옆방에서 코 고는 남편 흉도 보며 아직 시집 못 간 딸아이 걱정으로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그런 당신과 살고 싶어요.

 

굵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이마의  주름이 흉해 보이지 않고 희끗한 귀밑머리에 작년에 며느리가 생일 선물로 사준 올이 굵은 스웨터를 입은 당신의 무릎을 베개 삼아, 문지방 끄트머리까지 들어오는 햇살을 이불 삼아 덮고 곤히 잠들고 싶습니다.

 

빈 가슴에 말라붙은 당신의 젖가슴이 자식들 걱정으로 더 쳐져도 텃밭으로 파헤쳐진 당신의 손바닥에 고달프던 지난날이 커멓게 피멍으로 물들어도 그런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만 작은 소망이 있다면 눈발 날리는 저녁 강가를 거닐 때 품안에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든 시집이 들려 있어 행복해하는 그런 당신과, 어느 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둘이 나란히 누워 손잡고 마지막 가는 길도 함께 가도록 그렇게 당신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핼길을 가고 싶군요.

 

글 출처 : 잃어버린 사랑을 위하여(솔로몬 닷컴) 中에서 유수님이 남긴 글입니다.

 

배경음악 : Vai Vedrai / Sergei Trofa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