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우선순위에 대해 흥미로운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흰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열 명쯤 적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배우자와 자식들부터 적지요. 그다음에 부모님이나 형제, 그러고도 숫자가 다 채워지지 않으면 친구들  이렇게 적는 것이 보통입니다.

 

  적혀 있는 명단을 살펴본 뒤 이번엔 갑자기 전쟁이 터졌다고 가정합니다. 아무리 상상이라 해도 전쟁이라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조금 긴장하게 되지요. 그런 뒤 항공권을 나누어줍니다. 물론 상상속의 항공권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항공권을 딱 석 장씩만 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 방금 적어 놓은 명단 중에서 만약 해외로 도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다면 꼭 비행기에 태워야할 사람을 세 사람만 선택하도록 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을 포함해 가족이 세 사람뿐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해도 대부분은 자식이나 배우자가 우선이니 부모님은 버려두고 떠납니다. '살 만큼 사셨는데 어쩔 수 없지.' 하고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면서 말이지요. 물론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부모님 중 한 명을 비행기에 태우는 사람도 없진 않습니다.

 

  문제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명단에서 자신을 제외해도 표가 모자라는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던졌는데도 사랑하는 사람 중 누군가를 구할 수 없는 상황말입니다. 그런 상황과 마주치는 순간 사람들은 분노나 슬픔,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를 내던져서라도 구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 사람만은 꼭 위기에서 구해내고 싶은 대상이 있지요.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것만해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테스트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감정적 반전을 겪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구출하고 싶던 사람 중 누군가를 떠올려 이번엔 그 사람 입장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했던 그 사람은 과연 위기의 순간에 나를 우선적으로 구하려고 할까?' 하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노부모님을 버리면서까지 비행기에 태우려 했던 자식이나 아내(또는 남편)는 과연 석 장밖에 없는 비행기표를 나에게 배당할까?'

 

  서슴없이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경우에는 편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오' 이거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에 잠겨야 하는 순간, 지금까지 상대방을 향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나의 감정은 모순과 부딪히게 됩니다. 사랑의 감정이 미묘한 저항의 에너지로 변화를 보이는 것이지요. 서운함이나 괘씸한 감정도 일어날 수 있겠지요. 내가 모든 걸 제쳐놓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정작 나는 우선순위에서 함참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커다란 배신감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대상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혹시 내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이 그 사람이거나, 그 사람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이 나인 경우는 없을까요?

 

글출처 : 이 별에 다시 올 수 있을까(김재진 산문집, 시와시학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