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 꼭 티가 날까. 어른들은 약속 시간에 늦는다든지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를 한다든지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사람들을 곧잘 훈계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안정된 표정과 모범적인 몸짓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정을 못 숨기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훨씬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내적 부정직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아첨하는 표정이나 괜찮은 척하기가 안 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마음의 표정이 바로 페르소나persona다. 페르소나는 성격과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 모습의 한계’다. 자기 안에 도사린 수많은 그림자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겉으로만 말끔한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포커페이스’라 부른다. 그림자가 내면의 주인공이라면 페르소나는 외면의 주인공인 셈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 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내 상처를 남들에게 들키더라도 노발대발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꽁꽁 숨기는 사람들은 외면의 페르소나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길리언 플리Gillan Flynn의 소설 『나를 찾아줘』에서처럼, 남들에게 보여주는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현실의 자아’가 따라가지 못하자 현실의 자아를 완전히 말살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바로 그 ‘이상적 자아’의 환상을 위해 ‘가장 나다운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파국을 맞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남성의 미모가 그다지 환대받지 못하던 19세기 말 런던에서, 아름답지만 개성 없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아간다. 그런 그레이에게 자신의 미모가 얼마나 커다란 재산인지를 일깨워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재 화가 바질이 그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리고, 초상화를 본 탐미주의자 헨리경이 그의 미모를 불후의 명작쯤으로 찬미한 것이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레이에게는 ‘나는 누구인가’를 성찰하게 해줄 믿음직한 조언자가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런 과찬을 듣자 그레이는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발견한 나르키소스처럼 스스로에게 열광한다.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매혹당한 그레이는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소원을 외친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특한 모습으로 변하겠지. 그런데 이 그림은 항상 젊은 상태로 남을 것이 아닌가. 거꾸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고, 그림이 늙어간다면!


   그레이의 이 말도 안 되는 소원은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초상화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가는 동안, 그레이는 변함없이 완벽한 미모를 과시하며 런던 사교계를 쾌락의 도가니로 만든다. 가는 곳마다 염문과 추문이 끊이지 않고, 그가 색욕과 주색잡기로 타락시킨 젊은이들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오래전에 나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일종의 환상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리얼리티가 넘쳐난다. 그레이는 환상적인 자아의 이미지, 남들에게 전시되는 외적인 이미지만 신경 쓰느라 정작 내 마음의 안부를 묻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외부 일정이 없을 때는 거의 은둔하며 글만 쓰다시피 하는 아 조차도, 누군가를 만나 오랜만에 ‘사회생활’을 한 뒤 집에 돌아오면 ‘친절의 가면’ 혹은 ‘뭐든지 괜찮은 척하는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수많은 소셜미디어에 전시되는 자아의 멋진 이미지를 가꾸고 수집하느라 정작 우리에게는 내 마음의 안부를 물을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