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고 있던 그녀는 잠시 책을 덮었습니다. 소설이 아름다워서 그렇기도 했지만, '성냥'이라는 단어 때문에 갑자기 울컥해졌기 때문입니다.

 

 

   차로 한 시간이 걸릴 만큼 먼 거리에 떨어져 살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에야 돌아가곤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의 만남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그렇게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죠.

 

   한 달쯤 지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제 그만 바래다줘도 된다고 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듯 변함없이 그녀를 데려다주고, 다시 먼 질을 돌아가곤 했죠.

 

 

그녀는 조마조마했습니다.

이 고단함이 사람을 일찍 끝나게 말들까봐.

그리고 그것보다 더 조마조마했던 것은

그가 더 이상 그녀를 바래다주지 않는 날이 왔을 때

그것을 '그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증거로 받아들일까봐.

 

 

   언젠가 그녀가 이런 불안함을 털어놓았을 때 그는 말했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나에게 성냥불을 켜는 일보다 쉬운 일이야."

 

 

   결국 그 성냥불은 꺼지고 말았습니다.

   영화 <첨밀밀>에서 자전거를 함께 타던 연인들이 이별 뒤에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녀는 그와 헤어진 후 성냥불을 켜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작고 허약한 몸체를 가진 '성냥'이라는 단어가 그녀에겐 너무나 무겁고 아픈 단어가 되었습니다. "성냥불 켜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는 그의 표현은 그녀에게만큼은 잘못된 것이었죠.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성냥불을 켜는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는 '성냥'이라는 단어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별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ㄹ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다신 한 번 소설 속 그 대목을 읽어봅니다.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성냥'이라는 무겁기만 한 말이 다시 하얗고 가변운 단어가 되어 화르르 점화될 날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글 출처 : 김미라(저녁에 당신에게, 책읽는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