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는 건지 공부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많은 책을 읽으며 세상의 몰랐던 부분을 함께 나누던 그 시절은 애정결핍 상태로 성장한 그녀를 안정시켜주었고, 자존감을 갖게 해주었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인식시켜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도 두려움 없이 그 사랑에 흠뻑 빠졌었지요.

 

 

   그러나 그와 결혼에 이르기에는 너무나 난관이 많았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녀가 현실적인 문제라고 내세웠던 일들은 모두 용기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변명이었습니다. 용기 없는 그녀는 그 사랑으로부터 비겁하게 떠나왔고, 지나치게 신중했던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정리하던 날, 그녀는 그에게서 선물받은 책 중에서 딱 한 권의 시집만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시집의 앞장에 그가 남긴 글이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만큼 많이 생각해.

 

    그 한 줄이면 충분했던 시절, 그런 시절이 나에게 있기는 했던걸까.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변한 시집을 펼쳐보면 생각합니다.

 

   그가 시집에 만년필로 썼던 글씨는 많이 흐려져서 이제는 알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기억이란 희미해진 그의 글써처럼 빛이 바래기도 하지만,

대개의 추억은 저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우리는 다만 은퇴한 배우처럼 조용히 머무르다가

가끔 추억을 재상영하는 극장에 들어와 조용히 관람할 뿐…….

 

   추억이 다시 오래된 극장에 내걸리는 늦가을 저녁, 그녀는 낡은 필름 위에 뒤늦은 자막을 넣어봅니다.

 

 

나도 그랬어요. 자존심 상할 만큼 많이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전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었던 것 같아요.

   

 글 출처 : 김미라(저녁에 당신에게, 책읽는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