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체류하는 동안 자주 들르던 자선 가게(charity shop)가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기금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기부한 중고 물건들을 정리하고 판매하는 일이 모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곳에서는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중고  CD를 2~3파운드에 살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한국에서 발매되지 않았거나 오래전 절판된 음반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 가게를 자주 찾았던 또다른 이유는 한 점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십대 중반의 그 남자는 장애로 심하게 일그러진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은 초식동물처럼 선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가 자유롭지 못한 입술과 혀로 간신히 무어라 웅얼거릴 때, 나의 귀는 그의 낯선 영어 발음에 친숙하게 반응했다. 키 큰 영국인들이 머리 위로 빠르게 토해내는 말보다는 그의 더듬거리는 말이 오히려 정답게 느껴졌다.

 

 

   가게에는 종일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레퍼토리가 나쁘지 않았다. 흥겨운 곡이 나오면 그의 구부러진 손가락들은 허벅지를 투욱 투욱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음악 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그 마찰음이 내가 더 귀기울여 듣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CD를 고르는 동안 내 시선은 그 슬픈 몸의 움직임에 더 우래 머물곤 했다는 것을.

 

   물건을 골라 계산대 위에 놓으면 그의 손가락은 이내 음악에서 풀려나 컴퓨터 자판의 숫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뒤틀리는 손으로 아주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렀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손가락들은 자주 에러를 냈다. 그러면 친절한 그의 동료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물건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들 중에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내민 지폐를 받아 넣고, 그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거스름돈을 건넸다. 크고 작은 동전들이 오그라든 손가락들에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흔들리는 물통 속의 물처럼 찰랑거리는 동전들, 나는 그 소리가 무슨 노래라도 되는 것 같아서 동전을 지갑에 쉽게 던져 넣지 못했다. 동전을 손에 꼭 쥐고 걸으며 그가 들려준 음악의 여운을 느끼고 싶어서.

 

 

글출처 : 나희덕(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