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부모가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직업은 없다


    담임선생님이 보기에 정완이는 왠지 모르게 늘 긴장하는 모습이어서, 때론 안타까운 느낌이 느는 아이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습이 예뻐 보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힘들어 보일 때도 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큰일 나는 것처럼. 그 아이에게는 여유나 장난기가 없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발표를 시키면 주저하지는 않지만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틀리거나 막히는 구석이 생기면 큰 실패라도 한 것처럼 낙담한다.

   정완이는 승부욕이 아주 강한지 무슨 수를 써서라 반드시 이기려고 해 친구들과 노는 모습도 즐겁게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편인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닦달을 하는 바람에 말다툼이 생기는 경우까지 있다. 아이치곤 승리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 아이와 노는 걸 은근히 꺼리는 것 같다.

   성격이 고분고분하고 심부름도 곧잘 해내서 유순한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함께 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호되게 야단치는 뜻밖의 모습에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정완이의 동생은 형만 보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피한다.

   선생님은 아마도 정완이에게 어떤 강박관념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늘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그래도 큰 말썽 일으키지 않고 매사에 열심히 하는 터라 관심과 애정이 갔다.

   정완이네 집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력과 지위를 가졌다. 아버지는 이름난 로펌의 변호사이며, 어머니는 TV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요리 전문가이다. 그래서 정완이는 다른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편이다. 이런 아이에게 이상하게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선생님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가 며칠 전 시험을 치른 뒤 정완이의 시험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호텔에 사는 고아다. 나도 아빠와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

   비슷한 푸념들이 정완이의 시험지에 빼곡히 적혔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을 것 같던 정완이가 토하듯 쏟아낸 글을 일고 선생님을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평소 어두운 그늘을 눈여겨봤던 터라, 아이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불러서 물어볼까 하다가 자칫 상처를 주지 않을까 싶어, 우선 부모님과 면담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선생님은 정완이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바쁘시겠지만 두 분이 꼭 함께 오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이 문제에 대해 꼭 부모님 두 분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바쁜 정완이 부모님이 함께 학교에 왔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정완이의 시험지를 부모님께 건넸다.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가끔 있어요. 그런데 시험을 보면서 이렇게 표현하는 건 드문 일이에요. 아이로서는 뭔가 힘든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이들 문제로 함께 학교에 오면 둘이 다투거나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많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오히려 사태가 악화되는 경우도 생긴다. 선생님은 그 점이 염려스러워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훌륭한 부모님을 둔 정완이가 가끔은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기는 했지만 아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 답답했는데, 이 낙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도 담임으로서 제대로 할 일을 못했다는 자책감이 듭니다.”

   정완이 어머니는 시험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는 얼굴이 벌개져서 천장만 바라봤다. 한동안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이제 일 그만두고 아이들 좀 돌봐.”

   아마도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고 괜스레 아내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이이는,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지금 일 그만두면 지금까지 쌓아온 게 와르르 무너진다는 걸 몰라서 그래요?”

   두 사람은 자식의 담임 앞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빴다. 선생님은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러놓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어 난처했다.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은 아이 문제에만 집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완이의 문제가 심각해서 부모님을 뵙자고 한 게 아니라, 혹시라도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우해 상의하려고 모셨습니다.”

   그제야 정완이의 부모님은 정중하게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부끄럽습니다. 특히 ‘호텔에 사는 고아’라는 말에 뼈가 시릴 지경이네요. 저는 그저 아이에게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아버지 된 도리라 여겼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걸 핑계로 밖으로만 돌았던 거지요.”

   고맙게도 정완이 아버지는 더 이상 펄펄 뛰며 아내를 닦달하지는 않았다. 정완이 어머니도 일을 하느라 아이들을 잘 돌봐주지 못한 걸 마음 속 깊이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 저는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적빈(赤貧)이 뭔지 생생하게 보면서 자랐지요. 제 형들 중에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에도 진급하지 못한 분도 계십니다. 다행히 막내인 저는 형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대학에도 갔습니다. 대학에서도 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야 했지요. 저는 반드시 성공해서 내 자식만큼은 그런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나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로 있다가 그게 한이 맺혀 돈을 좀 더 벌기 우해 변호사 개업을 했고, 지금은 대형 법률회사에 있습니다.”

   정완이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로펌의 변호사 생활은 판사 때보다 훨씬 더 바쁩니다. 그만큼 수입은 늘었지요. 그러나 늘 시간에 쫓겨 살았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아니 그걸로 제가 할 일은 다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자식 놈이 그렇게 외로웠다는 걸 몰랐다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집은 마련해줬는지 모르지만 좋은 가정을 꾸려주진 못했나 봅니다.”

   가장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가르치지 못하니 과외 선생님이라도 붙여서 공부하게 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기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그건 몰라주고 배부른 소리만 하는지 야속해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잠시 후 눈물을 닦은 정완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저도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네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좋은 본이 될 거라고 애써 제 입장을 정당화시키며,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가족을 위해 제대로 저녁 식탁을 차린 건 한 달에 서너 번밖에 되지 않네요. 밖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지쳐서 돌아오면 다시 부엌으로 가고 싶지 않거든요. 저는 방점 엄마였어요.”

   TV에서는 온갖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엄마가 집에서는 제대로 밥도 해주지 않으니, 아이에게는 마치 딴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말을 들은 선생님은 정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완이의 부모님이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정완이는 그런 불만을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늘 친절하거든요. 오히려 뭐든지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이어서 안쓰러울 때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정완이가 수업할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부모님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저희 부부가 집을 비울 때가 많다 보니 정완이에게 동생들 잘 보살피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아이에게는 그게 거대한 의무와 책임으로 다가왔나 봅니다. 저희도 최근에 그런 낌새를 조금 느끼는 중이었어요. 동생들이 정완이에게 꼼짝 못해요. 처음에는 못된 형이 동생을 못살게 구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제 딴에는 지나친 책임감 때문에 그런 모양입니다.”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큰아들에게 많은 걸 요구했던 것 같다. 그게 아이에게 얼마나 큰 부담과 억압이 될지 가늠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기면 큰아들을 먼저 야단치고 책임을 묻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정완이는 살갑지 않은 부모와 책임져야 하는 동생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이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저는 그저 아이들에게 좋은 울타리를 만들어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의 역할을 못했네요. 이제부터라도 일을 줄이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 신선하게 사태를 받아들이는 정완이 아버지의 태도에 선생님은 조금 놀랐다. 어떤 아버지들은 못난 아들이 잘난 아비 망신시켰다면 펄펄 뛰거나 아이들 닦달하는 경우도 많이 봐왔기에,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정완이의 변화될 모습이 그려졌다.

   돈이 아니라 사랑이, 저택이 아니라 소박한 가정이 참된 행복의 바탕이라는 걸 세 사람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창밖으로 한 쌍의 새가 아름답게 날고 있었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