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나보다 한 발 먼저 다녀간
시인이 있음을 발견한다


    누구나 생애 적어도 한 분의 선생님은 마음에 품고 산다. 내게도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대학 갓 졸업하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부임해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던 선생님은 열정과 패기가 넘치셨다. 때론 그게 넘쳐서 숨 막힐 때도 있었다. 결코 수업 시간에 늦게 들어오시거나 일찍 끝내고 나가는 법이 없으셨고, 심지어 결혼식 날조차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식장에 가셨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었던 것 같다. 당시 선생님은 세계사를 가르치셨는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체르니의 자서전》을 과제로 내주셨다. 한문이 섞인 매우 두껍고 어려운 책이었다. 중학생에게는 너무 힘든 과제였다. 아마 요즘은 대학생들에게도 그리 만만치 않은 책일 것이다. 그걸 방학 내내 끙끙거리며 읽고 감상문을 써갔더니, 그 어려운 걸 정말 다 읽었다며 기특하다고 상으로 책을 한 권 주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의 성품은 대쪽 같으셨다. 가끔 학부모가 감사하다며 사례를 하면 손사래 치며 거절하는 걸로도 유명하셨다. 중3 때 그분이 담임이 되셨다. 봄 소풍 때였던가? 나도 선생님께 성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존경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남들처럼 선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넉넉한 용돈 받으며 학교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버스비를 아끼기로 했다. 만만치 않은 통학 거리였지만 걸어 다니며 두 달을 모았더니 700원쯤 되었다.

   100원짜리 지폐 일곱 장을 하얀 봉투에 넣어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께는 뜬금없이 봉투를 내미는 내가 엉뚱해 보였을 것이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제 마음입니다.”

   펄쩍 뛰시며 야단까지 치시는 게 묘하게도 섭섭하지는 않았다. 당시 어려운 내 처지를 알고 계셨기에 더 그러셨을 것이다.

   “어머님께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드려라.”

   “선생님, 그거 제가 모은 거예요.”

   어느 정도 선생님의 기질을 안다고 자처했던 터라 딴에는 변명이랍시고 우물우물 대답했다.

   선생님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이놈아, 네가 돈을 모아서 왜 날 주는 거야?”

   “저도 한 번은 이렇게 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한참을 날 바라보시다가 어금니를 꽉 깨무셨다. 그러더니 꿀밤을 한 방 먹이셨다.

   “이놈, 이제 보니 아주 웃기는 놈일세. 그래 네 마음이라 생각하고 이건 받으마.”

   사내답게 크라고 꿀밤 먹이신 걸 그 나이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선생님께서 책 몇 권을 주셨다. 금세 책을 주면 자존심 다칠까 싶어 몇 달을 삭힌 후 그때 주신 것이리라. 내가 드린 700원은 그러게 엉뚱하게 몇 배로 돌아왔다. 그러니 오히려 선생님께 폐만 끼친 셈이 되었다. 괜히 이런저런 고민만 안겨드린 건 아닌지 지금까지 송구스럽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해마다 선생님께 찾아갔다. 사무님께서도 그런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그때 기어 다니던 선생님 자녀들이 이제는 모두 결혼해서 아빠가 된 걸 보면, 참 오래 사제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찾아뵈면 내게 ‘해라’로 낮추지 않으셔서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그 ‘700원 촌지’도 부끄럽지만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께서 정년퇴직하실 때 “아직 정년까지 더 남았네” 하신 말씀에 속아 정작 가뵙지도 못한 못난 제자가 되었다. 아마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봐 일부러 그러신 것이리라.

   선생님께서 거의 서른 해 가깝게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남들처럼 같은 단지라도 더 넓은 평수로 옮겨가지 않고(못하셨을 것이다. 구분 성격에, 그분 경제 사정에) 그대로 살고 계신 걸 보면 마음이 짠하다. 그 집에서 아이들 키운 것으로 만족하시는 두 분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동차와는 아예 인연을 두지 않으시려고 하신 듯, 그 흔한 운전면허조차 없어서 정년 후 한가한 시간에도 어디 한 번 가시려면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선생님. 어쩌다 강원도에 계신 친구 분께 가실 때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다니실 것이다.

   어떤 이는 선생님을 보고 세상사는 요령 없는 벽창호 같은 분이라고 혀를 차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꼿꼿하신 선생님이 안쓰러우면서도 자랑스럽다. 선생님의 박력 있는 꿀밤마저 이제는 그립다.

   프랑스 명문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시몬느 베이유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리세(고등학교)에 가서 청강을 했다고 한다. 22세에 철학 교수 시험에 합격한 천재성을 보였던 그녀가 왜 그랬을까? 복잡한 것을 뛰어넘는 단순한 것에서 진리를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T.S. 엘리엇이 《뿌리박기》라는 그녀의 유고집 머리말에서 “한 사람의 천재적인 여성, 그 천재가 성자(聖子)의 그것과도 닮은 한 여성의 인격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칭송한 꼿꼿함과 강인함은, 바로 과감하게 고등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던 ‘소박한 치열함’에서 길러졌을 것이다.

   나도 흔들릴 때만다 그녀처럼 선생님의 교실에 찾아가 사자후(獅子吼) 토하시는 수업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 실행한 적은 없다. 이제는 철이 들어 간절히 실행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그래도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나는 행복하다. 그런 선생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고 싶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