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연말이 되면 꼭 크게 앓아눕곤 했다. ‘연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쫓기는 느낌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벌써 연말이구나. 내가 올 한 해 과연 제대로 해놓은 게 있을까’하는 걱정과 의심 때문에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모습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걱정하다가 정작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하는 문제를 쉽게 잊곤 한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더 소박한 집, 더 작은 자동차, 더 검소한 옷차림에 만족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이나 외모에 집착하기 전에 책을 한 권 더 읽고,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일기를 한 장 더 쓰고, 손 편지를 한 통 더 쓰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연말에 꼭 호되게 앓고 나서야 깨닫는 게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프고 나면 정신이 바짝 든다. 평소에는 당연히 ‘내 것’처럼 느끼던 몸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내 몸이 파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제발 나를 그만 좀 혹사시키라고, 몸의 아우성을 좀 들어달라고 말이다. 호되게 앓고 나서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제야 깨닫는다. 마음이 바빠질수록 그 바쁨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오히려 내게 부족한 것을 ‘바쁜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라는 것을.

   나의 한 해를 이끌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의 한 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걱정거리의 주범은 무엇일까. 내년에는 조금 덜 걱정하고, 조금 덜 슬퍼하며 지낼 수는 없을까. 슬픔이 밀려오더라도 걱정이 밀려오더라도 좀 더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수는 없을까. 이렇게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는 게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에고이즘과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은 전혀 다른 게 아닐까.

   나는 꽤 오랫동안 ‘누군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방어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왔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나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쓸데없는 소비에 집착하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 더 잘 보이기 위해 괜스레 마음을 쓰고, 그러는 동안 ‘진짜 나다움’은 점점 사라져갔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게 많이 투자하는 게 아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고 해서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나만 돋보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만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타인 속의 나’, ‘세상 속의 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속의 나’를 똑바로 인식하는 게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길이다.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고, 타인에게 더욱 너그럽고, 그가 혹시 불편하가나 힘든 일이 없는지 보살펴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멋지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을 내 몸처럼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눈부신 내공의 소유자들이니까. 타인을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저절로 보살펴지니 말이다.

   이제는 가끔이라도 나 자신을 맘껏 칭찬해주고 싶다. ‘그만 하면 정말 잘한 거야. 한 해 동안 너, 정말 수고했구나.’ 타인의 시선에 짓눌리지 않고 싶다. 올해 연말에는 좀 더 나에게 너그러워지고, 타인에게는 더욱 너그러워졌으면 한다. 진정한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그리 멀지 않으니까.

글출처 :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정여울, arte)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