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겠습니다.
똑똑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으며
읽을 만한 글들만 읽겠습니다.
경쟁에 뛰어들지 않으며
자랑거리에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노인들을 공경하며
적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누군가와 다투었다면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겠습니다.


   그는 말 많은 것을 못 견뎌 했고, 큰 소리를 못 견뎌했다. 그는 그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다. 음악 속엔 인간의 소리가 없어서 좋다고 말하던 그의 어깨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떨까? 그는 문득 그렇게 질문했다. 날마다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마 어 얻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서로 차지하려고 싸워야 하는 세상의 가치들이 덧없게 느껴질지 몰라. 그는 그렇게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다.

   자신이 말기 암(癌)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는 날카롭게 저항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 그러나 이내 그는 저항을 거두어들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기도하며.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한 번씩 떠오르는 모습이다. 젊은 시절, 나의 정신적 멘토였던 그는 성직자였고, 나는 그의 죽음을 통해 생과 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지 않은 세월 살아오며 적지 않은 죽음을 목격했다. 때로는 염하는 동안 시신의 머리를 손으로 쥐고 수의를 입히는 일을 거들기도 했으며 때로는 애석한 마음 견디지 못해 시신의 이마에 입 맞추기도 했다. 그러나 숨이 떨어진 시신은 한결같이 차가울 뿐 보내는 이의 애타는 마음과 무관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태도는 여러 가지다.

   천수를 다한 삶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힘찬 더 살 수 있는 나이에 느닷없이 죽음을 통보받은 사람들 대부분 분노하거나 좌절한다. 물론 담담히 남은 인생을 정리하거나, 스스로 살아온 만큼의 내공으로 절벽 같은 그 순간과 마주하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죽음을 앞에 두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드물지만 눈부신 모습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빛내고 가는 사람도 있다.

   최근 감동적인 사례를 목격했다.

   지난여름, 한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은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다. 더위와 겹친 집안의 우환으로나 또한 마음 가누기가 쉽지 않던 때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사의 목소리는 침울하고 힘이 없었다. 오래 찾아뵙지 못했는데, 무슨 변고가 생기셨구나, 직감적으로 나는 은사의 불행을 알아차렸다.

   따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가라앉은 스승의 목소리만큼 내 마음도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그 나이의 젊은 처제를 불시에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을 때였다.

   여동생이 없는 내겐 친동생 같던 처제였다. 외아들이던 처남이 사망에 이어 갑자기 세상 떠난 처제의 부음을 나는 히말라야 산행 길에 받아들여야 했다.

   연락 끝에 만나 뵌 은사님 부부는 뜻밖에 담담했다. 딸을 보내자마자 장모님 상까지 당하는 바람에 많이 지쳐 있었을 뿐 이미 마음의 정리가 되신 듯 초연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상 떠난 스승의 딸은 의사였다. 똑똑한 의사로 장래가 촉망되던 그녀가 몇 해 전,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나는 그동안 완치된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병은 재발했고, 거듭되는 수수로가 긴 투병 생활 속에 그녀는 의사에서 불치의 환자로 처지가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전공한 의사답게 그녀는 그 와중에도 꼼꼼하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투병 t 생활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떠났다. 견디기 힘든 통증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도했던 그녀의 일기는 그러나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이 아니라 감사로 가득했다.

   “통증 부처님의 오셨다고 전화를 해요. 그러면 달려가 아이의 손을 어루만지며 함께 기도했답니다. 통증 부처님께도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기도였어요. 기도가 시작되기 전엔 온몸이 얼음같이 차가웠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거짓말같이 따뜻해지며 몸에 온기가 돌아왔어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 아이는 모든 것에 감사했답니다.”

   고통의 의미를 분석하고 꿰뚫어보며, 최후의 순간까지 귀의했던 절대적인 함 앞에 감사하며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울지 말고 내가 죽은 뒤 내가 마음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보여줄게. 엄마는 보게 될 거야’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는 그녀는 아마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ㅁㄹ 자신의 공부 정도를 증명해 보이려고 했던 것인지, 숨이 끊어지고 염을 하는 동안 그녀의 시신은 기적처럼 온통 흰 빛에서 시작해 점차 황금빛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인간의 생이 정말 육신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겠습니다.
제 행동을 쉼 없이 지켜보겠습니다.
사악한 말로부터 제 혀를 보호하며
말을 많이 하지 않겠습니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정말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행동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쉼 없이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겠다는 이 기도는 마치 매순간 자신의 호흡과 행동을 관찰하는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가톨릭의 베네딕트 성인이 했던 기도문이다.

   입고 있는 옷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진리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일까?

   프랑스를 여행하던 달라이라마는 그곳 산속에 있는 1,000년 딘 가톨릭 수도원에 가서 그곳 수도원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1,000년 전부터 가톨릭과 티베트 불교는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기도법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모든 종교는 각자 다른 말을 하고, 각자 다른 의식을 올리지만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화해를 원하는 메시지는 결코 다를 수가 없다.

   사악할 말로부터 혀를 보호하며,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똑똑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으며, 결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자랑거리에 집착하지 않으며, 노인들을 공경하는 일, 베네딕트 성인의 기도처럼 우리는 언제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적들을 위해 기도하며, 화해를 위해 해가 지기 전에 용서를 비는 큰마음을 정말 우리는 언제나 가질 수 있을까?

   눈앞에 온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내는 굳센 의지와 신념을 우리는 언제나 가질 수가 있을까?

   속된 가치로부터 초연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맑고 강한 마음을 언제나 내 것으로 할 수가 있을까?

글출처 : 나의 치유는 너다(김재진, 쌤앤파커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