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석세스 지방은 바닷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석세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인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에는 석회질로 이루어진 흰 절벽 일곱 개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 심하게 굽은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이 나무를 보니 해변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겠다.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도.

 

   겨울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이 나무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풍향계다. 가파른 바람이나 산정(山頂)도 아닌데, 나무는 굽을 대로 굽었다. 수직으로 자라야 할 나무가 거의 지평선과 평행을 이룬 채 굽이치고 있다. 게다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 때문에 삭은 가지에는 곰팡이와 이끼가 검버섯처럼 피어 있다. 하지만 가지 끝에 남아 있는 마른 이파리와 붉은 열매는 이 나무가 아직, 가까스로,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고행자의 풍모를 지닌 나무 앞에 서 있으니 예배당에라도 온 듯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는 하늘보다 땅을 바라보고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햇빛을 향해 가지를 뻗으려고 할 때마다 뒷덜미를 잡아채는 거센 바람에 다시 움츠러들곤 했을 것이다. 바람이 통과할 때마다 가지들은 부대끼며 비명과 신음 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잔가지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뒤엉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은 이 나무를 괴롭히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부리지. 이와 같이 우리 인간도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가장 심하게 구부러지고 고통받는 것일세.

 

   자라투스트라는 산비탈의 나무를 보면 이렇게 말했다. 나무가 바람에 굽은 것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단련되기 마련이다. 그 보이지 않은 손은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산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은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너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들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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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