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말로 ‘여자 사람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모처럼 현실을 떠나 맑은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만나던 대부분 친구와 연락이 끊어졌지만, 오늘 만난 그녀와는 해마다 한두 번은 만나왔습니다.

   결코 서로의 이상형은 아니어서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 오히려 좋았죠. 세상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고, 동성의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섬세한 감성도 이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읽은 책 이야기와 영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삶도 풍성해지는 느낌이 들고, 자극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만난 그녀는 더 특별했습니다. 무언가 전보다 근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아주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짐의 대부분을 정리하고 나니 이상할 정도로 삶이 홀가분해졌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작별하면서 인생에 새로 눈 뜬 것 같다고, 이렇게 가벼울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무겁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책도 스무 권 정도만 남겨놓았고, 옷도 절반 이상 버렸고, 더 이상 소비에 현호고디지 않으니까 삶이 더 윤택하고 풍서어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남겨진 스무 권의 책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하자 스무 권 중의 네 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삶을 정리한 사람이라면 무언가 단호한 표정은 가질 만도 한데, 그녀는 더 맑고, 더 고요하고, 더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부러움을 담아 “미니멀 라이프의 정점을 경험하고 있네” 하고 그녀의 변화를 축하해주었습니다.

   너무 맑아지면 차가워지기 쉽고 너무 간결하면 정 없기가 쉬운데, 그녀는 맑으면서도 따뜻했고 간결하면서도 너그러웠습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그는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중앙우체국으로 갔습니다. 그녀에게 선물해주려고 샀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많은 걸 버였다는 그녀 앞에 내놓기가 어색해서 끝내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녀를 보내고 생각해보니 정갈하게 비워진 작은 공간을 음악으로 채우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는 엽서 한 장을 사서 이렇게 썼습니다.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다 버려도 버릴 수 없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정갈한 너의 공간에 버릴 수 없는 음악이 붕붕 떠다니길 바라.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은 것과 더불어 행복해지길 바라.


글출처 : 저녁에 당신에게(김미라, 책읽은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