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아침 햇살이 처마 끝에 걸려 금세라도 그늘을 걷어낼 기세다. 라디오에서 느리고 묵직한 가락으로 시작되는 프란츠 폰 주페의 ‘시인과 농부(Dichter und Bauer)’ 서곡이 흘렀다. 마치 넉넉하고 느긋한 전원의 아침 풍경을 그려내는 듯 여유롭다. 그러더니 이내 새로운 풍경이 겹쳤다. 곡은 행진곡처럼 씩씩하게 달려가더니 농부의 소박한 삼박자 춤으로 이어졌다.

   그는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묻어난다. 예전에는 그저 밝고 명랑한 느낌이 좋아서 즐겨 들었던 곡이었을 뿐이다. 물론 제목에 ‘시인’이 들어가서 조금은 반가운 마음도 들기는 했다.

   그는 시인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렇듯이 그의 삶도 질박하다 못해 가끔은 궁기가 들 때도 많다. 그래도 시를 쓸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기에, 시 한 편 쓸 때마다 머리 쥐어박고 모질게 몸살을 앓으면서도 시를 접지 못한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천생 시인이라고들 말하는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그냥 시만 쓰고 살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밥벌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출판사에 취직해서 글밭 쟁기질하고 뒷갈망해주는 작업을 얻을 수 있어서 고마운 일이라고 하는 걸 보면, 때론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해 보일 때도 있었다.

   어떤 이는 고치에서 실 뽑아내듯 줄줄 쉽게 멋진 시를 쓰기도 하던데, 이 답답한 위인은 시 한 편은 고사하고 어떤 때는 한 줄 가지고 밤새 끙끙대며 산고를 겪는다. 그렇게 어느 휴일 이른 새벽 기진맥진해서 겨우 잠이 들었는데, 난데없는 택배 하나가 그의 늦잠을 깨웠다. 뜬금없이 쌀 한 가마가 그에게 배달된 것이다. 보낸 사람은 초등학교 친구였다.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게 웬 쌀이냐?”

   “벌써 도착했냐? 올 가을 첫 수확한 쌀ㄹ이다. 맛있게 먹어주면 고맙겠다.”

   친구는 왜 쌀을 보냈느냐는 물음은 가볍게 눙치고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았다.

   “너 힘들게 수확한 쌀을 왜 내게 보냈느냐고?”

   농부가 한 가마의 쌀을 얻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힘들여 거둔 곡식이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걸 잘 아는 그였다. 그래서 농부 친구가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이 되다 보니 오히려 말에 날이 섰다. 퍼런 날이 아니라 따뜻한 우정의 날이지만 말이다.

   “짜샤, 이 형님의 보내주면 군소리 말고 그냥 ‘고맙다’하고 잘 먹으면 되지 뭘 그리 따지누. 명색이 시인이란 놈이 그렇게 말이 메말라서야 쓰겠냐.”

   그 친구는 고향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고 있다. 나라 안팎의 형편이 갈수록 농부의 삶을 옥죄는 게 마음이 쓰여서 몇 해 전부터 일부러 친구의 쌀을 팔아주고 있다. 작은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마음에 시작했지만, 혼자 사는 살림에 그저 10킬로그램도 한참을 먹는 터라 가마 단위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라도 그 쌀 좀 팔아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남들에게 아쉬운 부탁 못하는 숫기 없는 그의 성격에 그것도 제대로 못해주는 게 늘 마음의 빛으로 박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쌀 한 가마가 예고도 없이 배달되었으니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런 심절을 익히 알고 있는 듯, 농부 친구는 묻지도 않은 날을 했다.

   “인마, 공짜로 먹을 생각은 하지 마. 그렇다고 돈을 보낼 생각을 더더욱 말고. 앞으로 쌀 한 가마 보낼 때마다 내게 시 한 편만 써줘. 그래, 시 쓰는 게 농사짓는 것만큼 힘든 거 안다. 꼭 보내지는 않아도 좋아. 그냥 열심히 시 쓰고 열심히 살아주면 돼.”

   “미친 놈. 잡지나 신문에 시 한 편 실어봐야 쌀 한 말 값밖에 안 돼. 그러니 이건 공정한 거래가 아니지. 쌀 값 보내마.”

   시인이 가난하지만 농부도 가난하기는 매한가지라는 걸 잘 알기에, 시인은 공짜로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깔끔을 떨었다. 계좌 변호를 알려달라는 시인의 말에 농부 친구는 화를 냈다. 그렇다고 애들 말마따나 ‘빈정’ 상하지는 않았다.

   “너, 그거 보내면 절교다.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사실 시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넌 이미 값을 다 치른 거야. 네가 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인마, 시인을 친구로 두고 있는 농부가 흔한 줄 아냐? 나 그거 뿌듯하다. 신문에 네 시가 실릴 때마다 아는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고 읽어주며 자랑하는 거, 은근히 우쭐하거든. 너 그거 모리지? 그러니 내가 지은 쌀로 네가 밥해 먹고 좋은 시 쓰면 내가 두 배로 행복할 거야.”

   시인을 전화 통화가 아니고 마주보고 나눈 대화였다면 주먹으로 한 대 갈기며 덥석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물을 보이지 않아도 될 전화여서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다. 그거 참, 서로 행복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일이다.

   “야, 시인. 우리 중학교 때 음악 시간에 듣던 ‘시인과 농부’라는 곡 기억 나냐? 제목에 농부가 있어서 그런지 난 그게 참 좋더라. 게다가 시인까지 들어갔잖냐. 이거 딱 우리 얘기지.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가 그 제목에 시인이 들어 있어서 슬쩍 민망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과 은근히 통한다 싶었다.

   “싱거운 자식. 그러면 그 곡은 너랑 나를 위해 작곡된 곡이냐?”

   시인은 얼굴에 여드름이 분화구처럼 듬성듬성 흩어져 있던 중학생 시절 음악 시간에, 그 경쾌한 서곡을 행복하게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변성기 때 무리해서 소리 지르며 노래하는 것보다는 감상을 배우라며 많은 곡을 들려주셨던, 까까머리 사춘기 소년들의 우상이던 음악선생님은 그 곡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몇 해 전 그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뒤 마음에 걸리고 눈에 밟혀서 한때는 일부러 외면했던 곡이다.

   “야, 시인.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겠지만, 뭐랄까, 네 시에는 꿈틀대는 정직한 삶이 들어 있어. 내 비록 무식한 농부지만 그런 것쯤은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지. 자랑스럽다. 네가. 그런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사는 건 조금 힘들지? 어쩌겠냐. 시인은 가난한 법이라더라. 어쩌면 세속에 휘둘리지 않고 가난도 너그럽게 묵인할 수 있어야 시를 쓰는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 밥은 굶지 않게 해줄게. 이 형님이 말이야.”

   시인은 목에 메여 대답을 못했다. 언어의 어색한 부재가 이어졌다.

   “나 오늘 재준이네 추수하는 거 도와주러 가야 된다. 이만 끊자.”

   마치 화상 전화로 보고 있는 듯 농부 친구가 마무리까지 해주며 끊었다.

   농부 친구가 보내준 쌀은 아직 한참을 더 먹어도 될 만큼 남아 있다. 친구가 보내준 쌀 한 톨 한 톨이 그에겐 시 그 자체였다. ‘시인과 농부’ 서곡에 ‘시인’이 들어 있어서 좋아했던 가난한 시인은, 이제 그 제목에 ‘농부’가 함께 있어서 좋아하게 되었다. 아마도 주페는 100년도 훨씬 전에 두 사람을 알고 그 곡을 쓰지는 않았는지, 그게 참 궁금해진다.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


주페 시인과 농부-서곡(Suppe - Dichter und Bauer - Over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