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성북동 셋집에 혼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넣었지요. 전화번호는 분명히 맞는데, 결번이라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나중에 손전화가 연결되어 물었더니 늙은 어머니는 전화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끊었다 합니다. 자책이 날선 칼날이 되어 가슴을 베고 지나갑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어머니는 물었지요. "별일 없구요. 집에 한 번 다녀가시라구요."하고 손 전화를 끊었습니다.

 

백내장 수술을 세 번 받은 뒤로 아버지는 시력을 아주 잃었지요.
어머니는 눈 어두워 새 옷을 뒤집어 입는 늙은 아버지를 구박했습니다.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하며 병원과 집을 오갔습니다. 결국 중환자실에 들어가시더니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하고 먼 길을 가셨지요. 그게 이태 전 일입니다. 늙은 아버지를 구박하는 즐거움을 잃자 어머니도 갑자기 늙었습니다. 자주 무릎이 아프다고 어린애처럼 징징거립니다.

 

어린시절엔 어머니가 노래하는 걸 못 들었지요. 외가(外家) 사람들은 대개 음치고, 더구나 사는 게 고달파서 노래엔 취미가 없었을 거라고 추측해봅니다. 소년시절 들었던 어머니의 노래는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 한 곡 뿐입니다.

 

그 시절 삽십대의 어머니는 앳되었겠지요. 소년의 눈가가 젖었던 것은 어머니의 노래가 구슬펐기 때문입니다. 노랫말 속에 삶의 고단함이 묻어났던 것이지요. 칠순에 접어든 늙은 어머니는 뒤늦게 바람난 것처럼 퇴행성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끌고 새 노래 배우러 구청 노래교실에 나가십니다.

 

글 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글 : 뿌리와 이파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