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다. 런던을 떠나기 전 마지막 눈일 것이다. 날씨가 좀 춥긴 했지만, 한 해 동안 즐겨 걷던 템스 강변을 이별 의식이라고 하듯 천천히 걸었다. 강을 따라 일렬로 놓인 벤치에 오늘은 사람들 대신 흰 눈이 곱게 내려앉았다. 이따금 작은 새들이나 아이들이 벤치에 쌓인 눈을 툭 치며 간다. 가때마다 벤치 등판에 새겨진 이름들이 드러난다.

 

   그 벤치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기리기 위해 템스 헤리티지 트러스트(Thames Heritage Trust)에 기증한 것이다. 초록 벤치의 등판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너무나 사랑했던 우리 어머니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아름다운 삶이 이곳에서 영원하기를' '템스 강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친구를 위하여'……. 이런 문장들 아래에는 고인의 이름과 생몰연도가 적혀 있다.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벤치도 있고, 때로는 앞서 떠난 자식을 기리는 벤치도 있다. 잘 알려진 시나 소설 문장이 적혀 있는 벤치도 있다.

 

   내가 산책하다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Que sera sera' 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서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읆조리다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그날 저녁 산책에서 돌아와 아이들에게 제법 비장하게 말해 두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양지바른 언덕이나 강가에 묘비 대신 벤치를 놓아 달라고, 죽어서도 차가운 대리석 묘비보다는 나무의자가 따뜻할 것 같다고, 그 벤치에 누군가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거나 사랑을 나누어도 좋겠다고, 아니면 오늘처럼 아무도 앉지 않고, 종일 흰 눈만 소복하게 쌓여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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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