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에 분필로 쓴 글씨처럼 지울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 진다는 것도 눈물겹게 감사한 일이다. 정말 다행이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어서....

 

  어느 날이었던가,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교실로 향했던 적이 잇다. 그때 교실에 남아 있던 한 친구가 칠판 위에 누군가의 이름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지우는 것을 보았다. 교실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친구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아 조용히 돌아서서 왔다.

 

  친구가 칠판에 썼다가 지우던 이름은 그를 얼마나 설레게 하는 이름이었을까? 얼마나 두근거리게 하고, 얼마나 쓰라리게 하는 이름이었을까? 

 

  칠판에 쓰는 글씨는 부치지 못한 편지다. 부치지 못할 편지와도 같은 이름을 마음의 칠판에 써보지 않고 청춘을 지나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기장에도 남길 수 없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씨가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한 줄은 글도 좀 더 신중하게 쓰게 되리라. 그 대신 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지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때론 잉크처럼 의미해지는 기억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글 출처 :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김미라, 쌤앤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