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만나는 사람들에게 백지 명함을 내밀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거 잘 못 준 거 아닌가요?” 하며 물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뜻밖에 아무 반응 없이 그 명함을 받아 넣었습니다. 조금 의아한 듯 ‘무슨 심오한 뜻이 있나?’, 아니면 ‘이 사람 또라이 아냐?’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내가 타인에게 아무런 판단도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타인 또한 내게 아무런 판단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름 없이 살고 싶은, 아니 꼬리표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이 세상엔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 세상에 스스로 판단을 받고 싶어 하는 이름들이 넘쳐납니다. 여기서 판단 받고 싶다는 말은 곡 ‘인정받고 싶다’는 말이지요. 판단 받고 싶어 애쓰는 이들의 명함엔 대부분 화려한 직함들로 빛나는 긴 꼬리표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새겨놓은 꼬리표는 결코 마음에 고요함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나 또한 그런 꼬리표를 누군가에게 붙이거나 남들이 내게 달아놓은 꼬리표에 익숙한 채 살아왔습니다.

   남아 있는 생애 동안 백지 수표를 받는 횡재를 바라지는 않지만 한번쯤 누군가가 내미는 백지 명함을 받고 싶은 날이 가끔 있습니다.

글출처 : 이 별에 다시 올 수 있을까(김재진 산문집, 시와시학사)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