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 모른다 하는 것이 으뜸이요, 모르면서 안다 하는 것은 병이다.

다만 병을 병으로 알면 이로써 병을 앓지 않는다.

성인은 병을 앓지 않으니 그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을 앓지 않는다.

 

   『도덕경』은 차례대로 읽은 대신에 마음 가는 대로 펼쳐서 읽는데, 새벽에 펼친 부분을 그 날의 화도도 삼습니다. 오늘 펼친 부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오지요. 부유병병(夫唯病病), 시이불병(是以不病). 다만 병을 병으로 알면 이로써 병을 앓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성인은 병을 앓지 않는데, 이는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요. 더러는 모르는 것도 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경우는 희귀한 일이지요. 안다는 것은 밝음이며, 눈뜸입니다. 밝고 눈뜬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에 자만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 두려움이 없지요. 밝음과 눈뜸의 상태에 있는 것은 오로지 성인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여러 번 읽으며 그 뜻을 나름대로 새겨봅니다. 왜 아는 것을 잘 모른다고 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덕이 되는가. 병을 병으로 아는 것은 왜 병이 되지 않는가. 오늘의 시대에 성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이런 물음을 때로는 낮에도 생각하고 밤에도 잠을 줄여가며 묵묵히 새겨보는 것입니다. 

 

   며칠째 혹한의 우위가 중부 지방을 가로질러 갑니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이긴 하지만 품을 파고드는 매운 바람과 귀대기를 떼어갈 듯 기세 등등한 추위는 겨울을 겨울 답게 만듭니다. 땅 위에 약동하며 줄기를 뻗어가며 번성하던 만물이 시들어 생명을 거두고 땅에 오체투지하고 있는 그 위로 스산하게 바람이 불어갑니다. 혹한으로 몸이 움츠러들면 마음도 다라서 움츠러듭니다. 집의 견공들도 양지에 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언 몸을 녹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수백 마리의 가창오리가 떠서 자맥질하는 저 금광호수의 수면에 내려와 일렁이는 햇빛은 순금의 순도로 빛나고, 그걸 바라보는 자의 마음을 불현듯 고요하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장자』의 한 대목을 펼쳐 놓고 생각에 빠져듭니다. 사마천의 『사기』 에 따르면 장자는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일찍이 몽(蒙)이라는 곳에서 칠원리라는 말단 관직에 있던 사림입니다. 몽이라는 곳은 오늘날의 중국 허난성 상추현 동북지역에 있던 지명입니다. 당시 강국의 하나였던 초나라 위왕이 장자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장자는 위왕의 사신에게 "차라리 진흙 투성이의 개천에서 나는 물고기 신세가 될지라도 나라를 가진 사람에게 속박당해 살고 싶지 않다. "고 거절했습니다. 

 

   『장자』는 그 장자가 쓴 책이름입니다. 한 나라의 역사가 반고의 『한서(漢書)』 '예문지'에 따르면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28편, 잡편 14편, 해설 3편 등 모두 52편으로 이루어졌다 하고,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가 10여 만 언을 썼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는 『장자』는 33편 6만 4,600자로 되어 있습니다. 본디의 『장자』에서 약 3분의 1쯤 유실된 ㅏㄴ본인 것이지요. 우리가 읽은 『장자』는 내, 외, 잡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중에 '제물론(齊物論) 107장을 펼쳐 읽어봅니다.

 

 

   나와 네가 논변한다고 사정하지! 네가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한다면 내가 과연 옳고 나는 과연 그른 것인가? 너를 이고고 네가 s를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옳고 너는 과연 그른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 가운데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그른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 모두 옳고 모두 그른 것인가? 아니면 너와 나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인가? 나와 네가 이 문제를 알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일을 알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바로잡게 할까? 너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으라고 할까? 이미 너와 의견이 같다면 아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할까? 이미 나와 같은 의견이 같다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나 그리고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할까? 이미 나 그리고 너와 의견이 같다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와 너 그리고 다른 사람이 모두 바로잡을 수 없으니 저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할까?

 

  사람들이 저마다 기준을 갖고 시비선악을 판단한다면 이 주장들을 바르게 판단할 수 사사사라는 기준은 세상에 없다는 얘기를 장자는 이렇게 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같지 않음은 그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다" 

 

  우리가 삶을 세워야 하는 사회, 혹은 세계는 저마다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말과 뜻과 몸을 비비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선악의 판단에 대한 다름과 차이가 늘 상존하고 거기서 갈등과 대립이 파생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법과 제도, 풍속과 규범들, 도덕과 윤리는 그것을 조정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이겠지요. 어느 국가나 사회, 혹은 조직과 집단 속에도 이런 것들이 살아서 공의롭게 기능해야 그 조직체가 두루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 통제와 관리의 시스템을 주도적으로 움직여나가는 것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명명합니다. 근대 이전에 그 권력의 핵심은 군사력과 법을 통해 사람들을 다스린 “군주 권력”에 있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그 권력의 유형은 간접화되고 은밀해졌는데, 사람을 훈련시키고 능력을 키워 그걸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에 통합하는 “규율 권력”과 섹스‧인구‧수명과 같은 사람의 몸의 집합적 총체에 작동하는 “생물적 권력”이 그것입니다. 군주권력은 만인이 일인의 군주를 우러러보는 시선으로 특징지어졌다면 규율권력의 시스템에서는 일인의 권력자를 만인의 시선이 감시하는 시선으로 특정 지어집니다. 지식인이란 자들(입 노동자)이 쓸모 있는 것은 그런 대목에서일 것입니다. 그가 속한 사회에 불만과 갈등과 대립이 불거져 나올 때, 특히 만인과 일인 사이에 그게 터져 나올 대 그에 대해 조정의견을 내거나, 권력이 “공의롭게 기능”하도록 하는 감시기능, 더 나아가 비판기능을 작동시켜 어느 한쪽의 힘이 일반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견제하는 것, 그게 지식인의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