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핀다.
내 안에 있는
등불이 일제히 켜진다.
지고 나서도 향기가 남은 꽃처럼
간 뒤에도 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는 사람 있다.


   동백 떨어져 흘러가는 물 위로 벚꽃이 피어 난리다. 물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동백은 절벽 위로 뛰어내린 백제 궁녀 같다.

   동백만 보면 보길도 생각이 난다. 아름다운 정자 세연정의 연못 위로 치마를 뒤집어 쓴 듯 떨어지던 동백꽃. 그러나 겨울 동(冬)이 들어가 있는 이름과 달리 동백은 겨울 꽃이 아니라 봄꽃이다. 봄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가는 4월의 동백이 세연정엔 절정이다.

   동백을 보면 보길도 생각이 나는 것은 처음 찾았던 봄이 워낙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작은 섬에서 휘파람새를 처음 만났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이 휘파람새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새는 밤새 울었다. 내가 묵었던 민박집은 기와를 얹은 오래된 한옥이었고, 소변을 보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가 새소리를 들었다. 여기저기 동백은 떨어지는가 하면 또 피고, 별빛이 쏟아져 난리였다. 세속의 시끄러운 일을 피해 섬까지 왔던 나는 꽃 피는 밤에 홀려 잠들지 못했다. 뒤 숲에서 처음 울던 새는 강강술래라도 하겠다는 건지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내 주위를 맴돌며 휘파람 소릴 내고 있었다.

그때 섬에서 잤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섬은 우리에게
아궁이었습니다. 따뜻하고 연기 나는 그곳에서 나는
밤새 울고 다니는 새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머리맡에서 울다가 한밤, 뒷간 가는 맨발까지 따라와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울어대던 그 소리가
휘파람 소리였다는 것을 아침에야 알았습니다.
동백 피는 소리였다는 것을 해 뜨고야 깨달았습니다.


그때 동백 피는 섬에서 떠올렸던 누군가의 이름을 나는 꽃 지기 전 지웠다. 다시 찾은 섬은 모란이 져서 서러웠고, 밤새 문고리 덜컹거리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꽃은 피어날 때 향기를 토하고, 물은 연못이 될 때 소리가 없다’고 했다. 언제 피었는지 정원에 핀 꽃은 향기를 날려 자기를 알린다. 마음이 잘 다스려 평화로운 사람은 한 송이 꽃이 피듯 침묵하고 있어도 저절로 향기가 난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사람과 만나고, 참 많은 사람과 헤어진다. 그거나 꽃처럼 그렇게 마음 깊이 향기를 남기고 가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꽃이 져도 향기가 남아 다음 해를 기다리게 하듯 향기 있는 사람은 계절이 지나가도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고, 달을 둥글게 한다. 피고 지는 꽃 하나하나가 다 예쁘고 향기롭듯, 세상엔 어느 것 하나 가치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다. 못난 사람은 못난 그대로, 잘난 사람은 잘난 그대로 크고 작은 나무들처럼 숲을 이룬다.

   벚꽃이 지고, 앵두꽃도 바람 따라 져버리고, 모란과 라일락이 피는가하더니 마침내 붓꽃이 정원 귀퉁이에서 흰색과 보라색의 정갈한 글씨를 남겨 놓는다.

   눈길을 끌며 피던 모든 것이 언젠가 지고 만다. 만나서 좋았던 사람도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 세상 가득 향기를 날리던 아카시아도 마당 가득 말라버린 이파리로 쌓여가고, 석축 위로 눈처럼 하얗게 얼굴을 내밀던 찔레가 머지않은 이별을 봄에게 알린다. 순백의 귀부인 같은 옥잠화가 필 날도 머지않았다.

글출처 : 나의 치유는 너다(김재진, 쌤앤파커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