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던 어린 시절은 백지 같은데
세상이 뭔가를 그려 넣으면서 비로소
분노나 슬픔이 생긴 것은 아닐까?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겐 죽는다는 말이 없으며, 필리핀의 한 부족은 미워한다는 말이 없다고 한다. 또 티베트 사람들은 자학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에스키모인 우트쿠족은 분노라는 말 자체가 없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그들은 아예 분노를 느끼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다는데 화 잘 내는 사람들로선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분노가 일어나도 그것을 절제하거나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 자체를 느끼지도 않는다니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역시 어린 시절엔 분노가 없는 상태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투명하게 순수하기만 하던 어린 시절은 마치 백지 같아서 세상이 그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넣으면서 비로소 분노라는 것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이름을 붙여야 할 대상이 없으면 거기에 따르는 말도 없다. 떠오르지도 않은 생각이나 소용없는 행동, 존재하지 않는 물건에 어찌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자고 나면 새 물건이 등장하는 현대는 물건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이름도 따라서 늘어난다. 인류는 점점 더 편리해지고, 손 하나 까딱 않고 모든 걸 처리하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자동차도 필요 없고, 도로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길이 움직여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주는 그런 날도 상상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편리해진 만큼 우리는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것에 밀려 또 다른 한쪽에선 사라지는 것도 많다. 저런 것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부지기수로 많다. 악의와 적개심으로 가득한 댓글, 이거 태어나지 않아야 좋은 것 아닌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을 텐데 하는 단어들을 떠올려본다.

   컴퓨터, 이거 없었으면 어땠을까?

   핸드폰, 이건 또 어떤가?

   문자한다, 이것도 없으면 안 되겠지?

   어느새 우리는 이것들에 길들어 살고 있다. 이것들의 노예라고 말하는 건 과장일까? 그러나 한 번쯤 과장해서 우리가 노예라고 친다면, 노예가 아닌 사람은 우리가 이것 없이 불편할 것이라 여기는 문명 바깥의 사람들뿐이다.

   스마트폰, 똑똑한 손전화 스마트폰.

   어쩌다 이걸 집에 두고 출근이라도 한 뒤 겪어본 하루는 어땠는가?

   컴퓨터가 고장 난 뒤 겪게 되는 몇 시간은 또 어떻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느새 이것들이 주인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도 찾아줄 것 같이 친절한 내비게이션은 웬만한 교회보다 더 종교적이며, 우리의 두뇌는 똑똑한 그것들에 밀려 점점 퇴화해간다.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단어만큼, 있었으면 하는 단어들도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

  
그리움,

   이거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그리움을 파는 어플리케이션을 나는 보지 못했다. 만약 그리움을 판다면 노래와 함께 팔았으면 좋겠다. 노래를 함께 팔기 위해 음원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리움의 노래는 마르지 않고 내 안을 맴돌고 있으니까, 다만 우리는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버려도, 버려도 내 안을 맴도는 단 한 가지가 내 안에 있으니까.

  
우정,

   이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부턴가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은 우정을 ‘인격에 대한 가혹한 시험’이라고 했다.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태양이 있고 그것을 우리는 친구라 부른다’고 했다. 우정이 사라져버린 세상은 태양이 사라져버린 어둠이다.

  
진실,

   이건 많이 있긴 하다. 다만 각자의 진실이 다르니 하나로 통일된 게 있다면 좋겠다. 해리 팔머는 ‘진실이란 자기가 지어내는 것과 자기가 경험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진실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경험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무방하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을 지어내고 있고, 그 생각의 잣대로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경험한다. 예컨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던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훌륭한 경험을 했다면 내가 지어낸 훌륭하다는 생각은 진실이 된다.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각자가 지어내는 생각 또한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그것이 각자의 진실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구수와 진실의 수는 아마 동일할 것이다.

  
믿음,

   이건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 나와 봐야 오래가진 않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있었다니 어디 가서 내려 받기라도 해야겠다. 혹시 믿음이 사용하는 메일 주소라도 받아놓은 게 있는지, 새로 나온 어플리케이션은 없는지 똑똑한 손전화로 검색해봐야겠다.

   독실한 믿음을 가진 한 종교인인 절벽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며 하느님을 찾았다. 비명을 듣고 나타난 하느님은 교인을 향해 내가 도와줄 테니 나를 믿고,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으라고 지시한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놓으라는 하느님의 말에 종교인은 독실했던 믿음을 금방 상실한 채 커다란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 말고 거기 다른 사람 없소?”

   하느님도 믿을 수 없는 이런 시대에 어디 가서 믿음을 찾겠는가?

   절벽에 매달리지 않아도 나 역시 다른 사람 없냐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다. 이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다시는 이 사람과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많다.

   살아가며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만나고 무수한 상황과 부딪친다. 무수한 사람을 믿었고, 무수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했다. 한때 신뢰했던 친구가 갑자기 불신의 대상으로 변하기도 하고, 돈 앞에 쉽게 무너지는 우정이나 사랑에 냉소를 보내며 다시는 그것들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진실은 알 수 없고 믿음은 너무 멀리 있다. 그러나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가 만나는 나 또한 믿을 수 없는 인물이며, 쉽게 무너지는 인물이다.
롱펠로우의 말처럼 ‘적의 숨겨진 역사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각자의 인생에 공감한 나머지
그에게 품던 적대감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다만 버려도, 버려도 내안을 맴도는 버릴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품고 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수많은 것들이 새로운 모양으로 마음을 흔들어도 세상엔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파른 세월이 강처럼 흘러가도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글출처 : 나의 치유는 너다(김재진, 쌤앤파커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