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어머니가 머무시던 방에 들어가니 몇 달 전 영정사진 옆에 내가 적어 두고 온 메모쪽지가 눈에 띈다. “엄마가 안 계신 세상 쓸쓸해서 눈물겹지만 그래도 엄마를 부르면 안 계셔도 계신 엄마, 사랑합니다…….라고.

   “엄마 아니면 누가 이렇게 언니의 자료를 모아 두었겠어?” 하며 동생이 내미는 파일을 보니 수십 년 전 내가 보낸 상본이나 메모, 신문에 난 기사들을 오려서 끼워놓으셨다. 동생이 물건 정리를 우선 했다는데도 곳곳에서 “이건 작은수녀 줄 것”, “이건 큰수녀 줄 것”하는 쪽지들이 나와 잠시 눈시울을 적셨다.

   성당의 노인대학에서 특별한 날 나누어 주는 타월이나 내의를 열심히 모아 두었다가 일 년에 두 번 수녀딸들이 있는 수녀원에 오실 적마다 웃으며 건네주시던 어머니. 아직 건강하실 적엔 고운 헝겊가방을 만들고 묵주 주머니나 털바지를 직접 떠서 소포로 보내주시곤 했다.

   ‘어머니가 세상에 안 계시면 누가 우리에게 그토록 다정하고 섬세함 가득한 편지와 소포를 보내줄 수 있을지? 미리 생각만 해도 쓸쓸하네!’라고 고백했던 언니 수녀님은 요즘 사 남매 중 어떤 형제보다도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하고 있을 것 같다. 임종을 못 지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빈소에도 가고 장례식장에도 참석했지만 언니는 엄률 수도회인 가르멜 수녀원의 수도자로서 장례식에도 참석 못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싶었다. 가뜩이나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언니는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겠지 싶다.

   부모를 여읜 성직자 수도자들이 공석에서 너무 많이 울면 볼썽사나우니 힘들어도 슬픔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말을 평소에 하도 많이 들었기에 나도 빈소, 장례미사, 하관예절에서는 모질게 맘을 먹고 잘 절제하여 그런대로 넘어갔지만, 막상 모든 일이 끝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서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자꾸만 눈물이 나 지금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성당에서기도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책을 읽다가, 빨래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문득문득 콧날이 시큰하고, 눈물이 고이고, 나의 전 존재 밑바닥에서 울음이 차오르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공허함과 쓸쓸함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가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절절하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포근한 집이었으며 아름다운 노래였으며, 한결같은 기도였음을 다시 절감하는 요즘, 어머니를 향한 이 깊은 그리움은 나를 좀 더 착하고 너그럽게 만드는 것 같다. 사물에 대한 욕심과 애착도 없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심도 넓어지는 기쁨을 체험한다.

   가신 지 백일 만에 딱 두 번 어머니 꿈을 꾸었는데 한 번은 비단 한복을 입으신 슬픈 표정으로, 또 한 번은 양장을 하신 기쁜 표정으로 나타나셔서 그리움을 달랜 일이 있다. 생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꿈길에 나타나셨던 어머니가 하늘소풍을 떠나신 후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간절히 빌고 빌어 아주 잠시나마 나타나신 거였다.

   어머니는 병석에 계실 적에도 누가 찾아온다는 말을 하면 “무얼 주나?”, “무얼 대접하나?” 걱정이 많으셔서 늘상 책이든, 성물이든, 액세서리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손님에게 나누어 줄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만 안심하곤 하셨다. “난 작은 것이라도 누구에게 선물하는 일이 참 기뻐!”,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왜 이렇게 앙증맞고 고운 것들을 좋아하는지 원!” 하며 미소 짓던 어머니 대신 이젠 내가 누구에게라도 무엇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항상 선물을 준비하면 산다. 며칠 전에는 큰 성당에 특강을 가며 그림엽서, 수첩, 물주, 내가 뜬 아크릴 행주 등 열두 가지의 조그만 선물들을 주머니에 담아 가 당일에 축일을 맞는 사람들을 앞으로 불래내서 나누어 주는데 신기하게도 꼭 열두 명이어서 다들 즐겁게 웃었다. 우리 어머니가 어디선가 내려다보시며 “수녀가 선물 준비를 많이 했네? 선물은 아무리 작은 거라도 늘 기쁨을 가져오지. 암!” 하며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날마다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어머니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고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내게 또 한 분의 ‘작은 하느님’으로 이 세상을 떠나서도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애인이다. 더 깊고 높은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사는 수도(修道) 여정에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를 가르치고 길들이며 교육하는 수련장이시다. 힘들어할 적마다 용기를 내라고 격려해 주는 정다운 친구이며 수호천사이시다. 자연이나 사물이나 인간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멋진 감탄사로 나와 함께 환호하는 예술가이며 시인이시다.

   마치 하늘나라에 있는 새집에 초청받아 이사를 가시듯 세상을 떠나신 김순옥 할머니는 90대에도 70대처럼 보이는 곱고 편안한 얼굴을 지닌 분이었다.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을 때 할머니는 위독해지셨다가 다시 살아나는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는데, 그날이 꼭 토요일이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마치 시집가는 날을 잡으시듯이 할머니도 가실 날을 잡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9월 8일 성모성탄축일 아침에 고운 미풍이 잦아들 듯이 고요히 떠나셨다. 좋은 날을 받아 이 세상의 집을 떠나 천국의 새집으로 이사를 가신 행복한 할머니셨다.

   몇 년간 어머니를 성심껏 돌보며 간호했던 가정간호 담당 요세피나 수녀님의 따뜻한 기록도 종종 읽어 본다. 나는 어머니의 친필로 가득한 조그만 수첩, 애용하시던 꽃손수건과 골무, 알록달록한 빛깔의 예쁜 단추들을 유품으로 지니고 있다. 내가 위로를 삼고 자주 들여다보곤 하던 수녀원의 분꽃나무를 출장 다녀온 사이 누가 싹둑 잘라 버려 얼마나 서운했던지! 어머니가 보내준 꽃씨를 심어 꽃을 피워 낸 어머니의 꽃나무였기에 더욱 서운했다.

   오늘은 보름달 속에서 환히 웃고 계시는 어머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계시는 어머니를 가까이 보고 싶어 빛바랜 옛 사진을 들여다본다.

   “수녀 잘 있지? 모쪼록 기쁘게 살고 감사하게 살아. 그러면 성인 될 수 있을 거야! 기차 타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수녀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눈 감아서 미안해.” 하고 속삭이시는 것만 같은 어머니를 향해 나도 나직이 이야기 한다.

   “엄마, 엄마는 살아서도 떠나서도 우리에겐 최고의 선물이셔요! 엄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이 마음 또한 큰 행복임을 두고두고 감사드립니다. 부디 편히 계십시오!”

글출처 :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해인 산문집, 샘터)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