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시인이 너무 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세 가람 건너 한 사람이 시인이라는 말까지 있다. 그래서 그게 나쁘다는 것인가 하고 되묻는 이도 있다. 스스로 시인이라 여기는 한 친구가 "시 낭송회나 강연회 같은 곳에 가보면 독자는 없고 시인만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소 자조적이던 그의 말은 결코 시인이 많아서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인도의 스승 오쇼 라즈나쉬는 "시인이란 세속적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부(富)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했다. 그가 말하는 부란 사랑과 진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유독 시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토록 대단한 존재가 시인이다.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늘어난다니 그걸 꼭 나쁘다고 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여기서 라즈니시가 말하는 시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시인이 되기위해 꼭 시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단 한 줄의 시를 쓰지 않았다 해도 시인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천 편의 시를 썼다 했도 시인 아닌 사람이 있다. 시인이 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다. 삶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며, 삶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시인이다."


  이쯤 되면 라즈니쉬가 말하는 시인이 어떤 존재를 일컫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문자로 된 시를 쓰는 차원을 넘어 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만난 시인들 중에 정말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선뜻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왜일까?


  어쩌면 시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중에 진짜 시인이 있는 것인지도 모론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다 보면 미안할 때가 있다. 세상에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책 한 권을 내기 위해 애꿎은 나무가 잘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펴낸 책이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고 서점의 한쪽 구석에 꽃히고 말 때면 도대체 왜 책을 내려고 하는지 스스로 한심스러울 때도 있다. 문맹률이 놓은 인도 같은 나라의 경우, 어떻게 보면 그 높은 문맹률이 자연을 위해선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많은 인도 사람이 모두 글자를 깨쳐 책을 읽고 또 쓰려고 한다면 지상의 나무가 남아나기 힘들 테니까.


   나무를 베어야 하는 책을 펴내려 애쓰기보다 라즈니쉬의 말처럼 세상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할 것 같다. 내가 쓰는 이 책이 한 그루 나무의 생명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봄이 가운데로 들어서고 있다. 벚꽃은 이미 지고, 새로운 꽃 소식이 들려온다. 마당에 있는 인동초가 피면 그 향기에 취해 보낼 날들을 기다린다. 혹한을 지나 들려오는 꽃 소식이야말로 한 편의 시가 아니겠는가. 메마른 가지마다 생명을 싹틔우는 봄이 진짜 시인이다. 


글 출처 : 사랑한다는 것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