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기엔 멀쩡하지만 2년 넘도록 병을 앓았다. 메니에르병(Meniere’s disease)이라는 이름도 이상한 질환. 어지럼증 뒤에 이명과 난청이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는 병이다. 의사도, 환자도 원인은 모른다. 원인 모를 병의 가장 흔한 이유는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몸의 어떤 부위도 마찬가지이지만, 귀 또한 한쪽이 안 들리면 불편함이 크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모노로 들으면서도 나는 온종일 음악을 즐긴다. 두 뒤가 다 안 들리는 상태에서 베토벤이 겪어야 했던 좌절은 얼마나 컸을까. 청력을 잃은 베토벤의 삶의 의미를 음악에서 찾았듯 나 또한 삶의 의미를 찾아 음악을 듣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겪을 만큼 인생을 겪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의 의미는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빨리 가는 세월을 한탄한다. 한편 얼른 세월이 가서 빨리 늙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라면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날의 삶보다 인생에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금이 좋다는 것일까? 나 또한 질풍노도의 시간이라 일컫는 젊은 날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좌절과 방황과 좌충우돌의 시행착오를 생각하면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젊은 날과 달리 몸이 보내는 적신호 앞에 걸음을 멈춰야 하는 노년 또한 원하는 것은 아니다. 

   SNS에서 보청기 홍보하는 영상을 보고 청력검사를 하러 갔다. 귀가 안 좋은 지인이 사용해보니 좋다며 권한 것이다. 그러나 검사 결과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태가 나빠 보청기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귀가 다 안 들린 베토벤만큼은 아니라도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무릎을 꿇는 기분이었다. 남은 귀를 잘 보존하라는 조언은 남은 귀 또는 나빠질 수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그러나 무릎 꿇던 마음을 이내 일으켜 세웠다. 한쪽 귀가 멀쩡하지 않은가. 지금 내게 온 이 고통은 세상의 더러운 소리를 절반만 들으라는 계시 같은 것이다. 수없이 겪은 인생의 우여곡절 중 하나일 뿐인 이것이 결코 내 삶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나는 이 정도에 무뤂 꿇지 않는다. 최면을 걸듯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찾아온 시련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정도의 시련은 시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다.

   오래전 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 시각장애를 가진 한 맹인학교 교사를 취재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다. 강화도 출신인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본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포탄을 주워 놀다가 폭발 사고가 나는 바람에 시력을 잃은 것이다. 시력을 잃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선명이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과 아침 바닷가의 햇살이라고 하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두 눈을 감은 채 아침 바다에 쏟아지는 햇살을 묘사하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두 분뿐 아니라 한쪽 팔마저 잃었지만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협주곡에 감동받아 피아노를 배웠다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를 감동시킨 곡은 작곡가인 라벨이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왼손으로만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음악이다. 한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하모니카까지 불던 그는 그 뒤, 시각장애 아이들을 위해 브라스 밴드를 조직했다. 눈으로 악보를 볼 수 없는 아이들이 점자 악보를 손가락으로 암기해 트럼펫을 불고, 트럼본을 연주하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그를 취재해 만든 프로그램 제목은 <빛은 어둠으로부터>라고 정한 것은 피디이던 내가 아니라 그였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그만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는 이가 어디 또 있으랴. 수만 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캄캄한 동굴도 단 한 줄기 빛이 들어오면 일시에 밝아진다. 어둠 속에서 탄생한 빛이 단숨에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것이다. 어둠은 빛을 만들어내는 산실이라며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어둠에 의미를 부여하던 그의 말대로 세상의 의미는 찾는 이의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이의 것이다. 불행을 불행이라 하지 않고 인생을 다시 배우는 기회로, 슬픔을 슬픔이라 하지 않고 기쁨과 희망 사이에 놓은 건널목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슬픔과 불행은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가르침으로 바뀐다. 고통과 시련을 삶이 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생을 영혼의 성정을 위한 학교로 여긴다. 비록 모범생이 되지 못한다. 해도 삶이 주는 가르침을 따라 고난을 공부라고 여기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성장한다.

글 출처 :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김재진 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