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공존?

  2011년 3월,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대지진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 등을 한 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 말이 없다. 이웃 나라에서 1만 5,000여 명이 죽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세계가 애도하는 그때, 한국 개신교계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가 한 말이다. 다른 얘기는 다 필요 없다. 예수님께서는 일본 대지진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 그것만 생각해보자. 그런 말은 아니었을 거다.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는 한 미국인이 말했다. “한국은 어쩜 그렇게 다른 종교들이 서로 잘 공존할 수가 있어요?” 무슨 얘기냐고 묻자, 한국에서 어느 교수의 집에 방문했던 얘기를 들려준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갔더니 다른 친구와 친지들도 여럿 참석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개신교, 가톨릭, 불교 신자들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정치, 사회적인 화제들로 대화를 나누는데, 이질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내세우며 논란을 벌이지 않아서 대화가 참으로 화기애애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놀랐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국의 세련된 종교 문화를 칭찬했다.

   낙태와 동성애 등 종교적인 교리와 관련된 이슈가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고,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시시때때로 표면에 드러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한국의 그런 모습이 평화로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맞다’고 동의할 수가 없어 어색한 웃음만 짓고 말았다. ‘공존’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한국의 종교들이 가진 서로에 대한 태도나 문화가 ‘공존’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존이란 ‘서로 다른’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종교 문화가 과연 그러한가?

   한국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절대로 껴내서는 안 되는 몇 가지 금기 화제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앞서 말한 바 있는 지역 얘기다. 고등학교 동창회나 향우회에 가서는 뭐라 떠들든 상관없지만, 사회적인 모임에서는 지역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왜? 그거 말하면 쌈 난다.

   금기 화제 중 또 다른 하나가 종교다. 왜? 외국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공존하는 문화라서? 아니다. 이것 역시 솔직하게 자기 생각 말하면 쌈 난다. 한국의 종교는 다른 종교를 절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을 거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하나님만이 올바른 신이고 개신교만이 올바른 종교이며 다른 건 모두 우상이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나쁜 것이니 절 같은 데 절대로 가지 말란다. 정확히는 못 알아들었지만, 알라신 얘기도 있었던 것 같다. 저기 서쪽에 있는 싸움 좋아하는 나라들의 신은 더 나쁘단다.

   그런데 얼마 뒤 학교에서 가을소풍을 절도 가게 됐다. 선생님의 절을 한 바퀴 구경시켜주며 불상 앞에서 석가모니에 대해 설명을 한다. 좋은 신이라는 것 같다.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절도 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거 큰일 났네, 부처님은 나쁜 거랬는데. 절에는 절대 가지 말랬는데. 아, 이거 큰일 났네.’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배타적 ‘편’ 가르기

   ‘내 편이 아니면 다 틀리고, 내 편이 아니면 다 적(敵).’ 한국 개신교 교회의 모습은 배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서는 대부분 ‘개신교’ 이외의 종교는 다 틀렸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는 악의 축이고, 불교는 우상이고, 가톨릭도 이단이라는 식이다. 심지어 같은 개신교 내의 세부 교파끼리도 서로 이단의 혐의가 있다고 공격하는 지경이다. 자신의 교파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렇다고 인정했는가? 누가 특정 교파의 교리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인정했는가? 성경? 성경 자체가 논쟁 대상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복음서들 사이의 모순된 내용은 기독교의 오랜 논쟁거리다. 실제로 성경은 수차례의 사본 과정을 거쳐 현대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또, 하나의 복음서에 대해서도 복수의 사본들이 존재하며, 어떤 사본이 진짜인지, 사본들의 내용이 원본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조차 정확하지 않다. 특정 교리의 배타적 절대성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자신들의 교파가 인정한 단 한 가지 해석만 절대적으로 맞는다고 주장한다.

   애? 우리 종교, 우리 교파, 우리 교회만 배타적으로 키우기 위해서다. 교회에서 하는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우리 교회의 발전, 우리 교인들의 부와 명예, 개신교의 교세 확장’만을 기원하고 있다. 옛날 뒷마당에 물 떠놓고, 또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했던 기도, 그 기복신앙과 다를 게 없다. 개신교가 다른 종교를 잠식해 더욱 확장하고, 개신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사회적 지배 계층으로 성공하는 것이, 예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란다.

   그러니 1만 5,000명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간 일본의 대지진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해석되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 아니면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 적어도 그런 뜻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그 정도로 박애가 없는 종교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비단 개신교만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의 종교는 대중들에게 진리를 깨우쳐주며 정신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배타적 정당성을 강조하며 외형적 교세를 확장하는데 더 치중하고 있다.

   여기서는 종교를 예로 들었지만, 내 편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는 배타주의는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한국 학계의 배타주의적 속성은 유명하다. 한쪽 성향의 교수 밑에서 공부하던 대학원생은 연구하다 다른 관심사가 생겨도 절대 다른 교수 밑으로는 못 들어간다. 그러면 배신자가 된다. 물론 돈이 많으면 관심 분야의 연구를 할 방법이 있기는 하다. 외국으로 가면 된다. 그렇게 한국을 등진 사람들, 나는 여럿 봤다.

   과거 학생우동 내부의 분열상도 그렇다. 1980년대 학생운동 조직은 크게 NL계와 PD계로 나뉘었다. 그들은 사상적 지향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1차적 목표는 하나였다. 권위주의 정권의 타파였다. 그 목표를 위해 투쟁노선을 합치시키고 노력해야 하는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가두투쟁마저 따로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다보면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까웠던 것은 서로를, 같은 목표를 위해 같은 길을 가는 동지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과 학생회의 부학생회장이 3학년 여자 선배였다. 여학생이 흔하지 않았던 과라 ‘언니, 언니’하면서 졸졸 따라다녔다. 힘들다고 하면 같이 술 마셔주다 취해 내 방에 와 함께 뻗어 자고, 연애를 포함한 각종 인생 상담도 해주고, 농촌활동 가서 피곤하다며 걸핏 하면 점심을 거르고 방에 들어가 토막잠을 자던 나를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한다’며 늘 감싸주던 언니였다. 그런데 그해 가을 나는 NL과 PD 중 한쪽 계열로 조직화되었다. 그 언니와 다른 편이었다. 그 뒤로 그 언니와 밥 한 번 같이 먹기가 힘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왜 나는 그 언니를 붙잡고 이런 말도 한 번 못해봤을까?

   “언니, 우리는 그래도 통하는 게 있잖아요.”

   아니, 차라리 이런 말이라도 해볼 걸.

   “언니, 진짜 뭐야. 우리 누가 맞는지 한번 까놓고 끝장 토론이라도 해보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언니의 존재를 같은 길을 가는 동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나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 ‘편’이 꼭 맞아야 되는데, 절대 우리 ‘편’이 틀리면 안 되는데, 혹시 밀릴까 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서로를 백안시하는 종교계 지도자들, 하계 다른 학파의 거두들, 분열한 지보 인사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 혹시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요? 당신들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 목표의 대상은 누구인가요? 차라리 터놓고 끝장 토론이라도 해보든가, 서로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는 없을까요? 부정하고 부정당해야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의심하고 싶다

   “꼭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세상 어딘가에는 아예 예수님을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신자가 목사에게 묻는다. 그러자 목사가 대답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참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개신교가 확장된 나라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런데, 예수님을 전혀 모르고 살더라도 그들 중에는 오히려 우리보다 더 예수님의 모습처럼 평생을 착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은 그럼 지옥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서 우리가 선교 헌금을 모으고 전 세계로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못 가는 곳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착하게 살아도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건가요? 하나님은 그렇게 관용이 없으신 분인가요? 예수님을 알 수도 없는 채로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오, 형제님! 믿으십시오. 의심하면 안 됩니다. 마귀가 형제님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자,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같이 기도합시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는 점이었다.

   우리 조직만 옳다고 믿는 문화의 가장 큰 폐해는 의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조직이 옳다고 인정한 교리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이론에 대해, 주류 학문의 경향에 대해,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곧 믿음이 약한 것이요, 신념이 부족한 것이요, 충성심이 흔들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른 조직과 속 터놓고 하는 대화와 교류도 어렵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박쥐’과로 찍힌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키기는 극히 어렵다. 그저 주류가 말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게 편하다. 의심과 논쟁, 다양한 견해의 충돌, 그 가운데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만 가능한 지보, 사상과 이론의 풍부한 발전은 처음부터 불가능해진다. 마치 고인물이 썩듯이, 서서히 썩어갈 뿐이다.

   내가 1년간 머물렀던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 한국학 연구소의 박성배 소장은 미국 내 저명한 불교학자다. 그는 모든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진리가 통한다고 본다. 진리란 본래가 하나로, 예수님과 부처님, 마호메트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깨쳐 각각의 종교로 승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각 종교의 교리는 하나의 몸에서 나온 다른 몸짓들일 뿐이다. 이 몸짓을 절대화하며 서로를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 몸짓의 주인인 몸, 즉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한다.

   한국 나이로 올해 여든 살인 박 소장은 이처럼 여전히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아직도 학교에서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불교학자로 이런 논지를 펼쳤다면 학자로서 생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한국학 연구소 정기 세미나에서는 방문학자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것들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토론을 벌였다. 학자가 아닌 나는 별로 할 얘기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쓰고 있던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一部)로 발제를 했다. ‘장유유서(長幼有序)는 권위주의에 유죄?’라는 제목으로, 앞에 나왔던 내용들의 일부였다.

   교수들은 내가 얘기한 권위주의적 문화의 사례들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비판했다. 첫째, 장유유서는 본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그럼 장유유서에 대한 구체적 해법이 도대체 뭐냐는 것, 즉 해법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유유서란 말은 빼고 권위주의만 비판하란다. 그래야 공격을 덜 받는다고, 그래야 뒤끝이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얘기를 죽 듣던 박성배 소장이 한 마디 하신다.

   “나는 그 말에 반대예요. 박 기자 얘기를 들어보니까 박 기자 책은 한국 사회의 문화를 후련하게 한번 비판해보자는 것 같은데, 그런 책에서 왜 반론을 걱정합니까? 그냥 던지고, 사람들이 반응하고, 그러면서 서로서로 자기 생각을 얘기하게 하면 돼요. ‘장유유서는 권위주의에 유죄다!’ 그냥 그렇게 가세요!”

   나는 다른 모든 교수의 말을 무시하고 박 소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올해 여든 살인 박 소장이 그분들 중 가장 멋졌기 때문이다.

   반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던지라. 정말 멋지지 않은가?

글출처 :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박에스더, 쌤앤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