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참 바쁘게 돌아간다고 느낄 때
한 번씩 멈추고 묻는다.
“지금, 내 마음이 바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바쁜 것인가? “

 

   사람들은 보통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어요. 마음은 내 몸 안에 있고 세상은 내 몸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몸 밖의 세상의 지배를 받아서, 세상이 내 마음을 슬프게 만들기도 하고 기쁘게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우리 마음은 거대한 세상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하고 작고 연약한 존재로 여기게 되지요.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놓습니다. 세상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투사된 내 마음을 보고 우리는 세상이 이렇네, 저렇네, 하는 분별을 일으키며 사는 것이라고요.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내 마음이 투사된 세상을 내가 보는 것이라니? 좀 쉬운 예를 한 가지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얼마 전 법당 불사(佛事)를 완공한 한 선배 스님이 들려준 말이에요.

 

   “집을 직접 지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법당 공사를 하던 중에 지붕의 기와를 올려야 하는 시점이 오니까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어딜 가나 가정집이든 절이든 지붕 위에 있는 기와들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다음엔 또 마루를 깔 때쯤 되니까 이번엔 가는 곳마다 마루만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어딜 가나 그곳 마루 나무의 결이나 색깔, 단단함 같은 것에만 눈길이 가더라고요. 그런데 이 사실을 제 스스로 자각한 순간 작은 깨달음이 있었어요.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이처럼 각자의 마음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을 복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었어요.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은 온 우주 전체가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한정된 세상이라는 걸 새삼스레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스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온 우주 전체를 인식하며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실 온 우주에서 무슨 일이 업ㄹ어지고 있는지 일일이 다 알 필요도 없고요. 그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이는 세상만을 인식하며 살고 있지 않나요?

 

   내 마음의 렌즈가 ‘지금 무엇이 필요해.’라는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내가 찾는 그 부분만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렌즈가 그곳으로만 향하게 되니까요. 이것은 마치 어른 스님이 지나가며 툭 던지는 한마디 말씀을 일반인은 그냥 지나치지만,  깨달음을 간절히 구하던 수행자는 그 안에 숨겨진 큰 가르침을 바로 알아채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거대한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좌지우지되는 수동적이고 연약한 존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의 렌즈를 세상의 어느 방향으로 향할까 하는 선택만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차피 내 마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한정되어 잇고,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보고 싶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세상도 따라서 그렇게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내 의지로 렌즈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사실 절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평소에 하던 버릇대로 따라가려는 관성의 힘이 강합니다. 평소에 싫어하던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좋은 면보다는 역시나 싫은 면이 먼저 보여요. 그런데 여기서 렌즈의 초점을 다시 맞춰서 그 사람의 좋은 면만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처음엔 거부감도 들고 인위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쯤 지난 후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내 주위에는 정말로 좋은 사람들만 있다고 나도 모르게 느껴집니다. 즉, 내 주위 사람들은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좋고 싫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렌즈의 방향 설정뿐만 아니라 렌즈 자체의 상태입니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렌즈는 갖가지 색으로 물이 들어요. 마음이 기쁜 상태라면 렌즈 자체에 기쁨의 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 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은 당연히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외로운 상태의 렌즈를 하고 있으면 세상 역시 참으로 외롭게 보여요.

 

   이처럼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자체는 행복한 일, 불행한 일, 아름다운 일, 더러운 일이 본시 없어요. 그렇게 분별하는 것은 세상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의 렌즈가 하는 것입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아, 외로워!’ 할 수도 있고 ‘아, 아름다워!’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똑같이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인데, 내 마음이 외로운지 평온하지에 따라서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미국에서 스님 본분으로 살랴 교수 본분으로 살랴 정신이 없습니다. 학자이기도 하고 선생이기도 하고 종교인이기도 하고 수행자이기도 한 삶을 살다 보면 정신없이 바쁘게 느껴집니다.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자로서 연구 활동도 해야 하고, 주말에는 3시간 동안 운전해서 뉴욕에 있는 은사 스님 절에 가 소임을 맡아서 일을 해야 합니다. 방학이 되면 바쁜 일정은 한층 더해집니다. 어른 스님께 인사도 가야하고, 통역 부탁 받으면 통역하러 가야하고, 법문 요청이 들어오면 법문하러 가야하고, 그런 와중에 혼자 수행하는 시간을 떼어놔야 합니다. 게다가 논문도 써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내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이게 뭐하는 건가 싶은 때도 사실 있어요. 내각 진정 승려가 맞나, 승려가 이렇게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도 있고요. 하지만 곡 알아채게 됩니다. 세상이 바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쁜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은 세상 스스로가 ‘와, 나 참 바쁘다!’라고 불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결국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바쁘게 사는 내 자신을 더 가만히 들여다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삶이 이토록 바쁜 까닭은 내가 바쁜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정말로 쉬려고 한다면 그냥 쉬면되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부탁이 들어와도 거절하면 되는 것이고, 그 거절을 못 하겠으면 핸드폰을 꺼놓으면 끝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하고 바쁜 일정 속으로 나 스스로를 밀어 넣은 것은, 내 마음이 어느 정도는 바쁜 것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큰 기쁨이고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쉬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내 마음을 현재의 시 간에 온전히 가져다놓으세요.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하는 바쁜 마음은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상념일 뿐입니다. 현재에 마음이 와 있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지금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상념이 없는 ‘바로 지금’은 바쁘지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뭐든 세상 탓만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좋고 싫고 힘들고 괴로운 감정들의 원인은 내 안에  내가 알게 모르게 심어 놓은 것일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합니다. 마음 따로 세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의 렌즈를 먼저 아름답게 닦읍시다.

 

글 출처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 쌤엔파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