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은 늘 충격이지만 올해는 유난했다.

장마가 시작될 무렵 먼 지방에서 뜻밖의 부음이 왔다. 세 살 많은 동네 형의 부음이었는데 어린 딸을 두고 교통사고로 생을 재촉하고 말았다. 어렸을 때 제법 따랐고, 흩어지고 나서는 드문드문 안부나마 전하고 지냈다. 형이 한 번 놀러 오라고 할 때마다 으레 한 번 가마고 했는데 이제 작정해도 소용없게 되었다.

고인은 아버지와 장형을 일찍 잃고 집안 장남 노릇 하느라 늘 어깨가 무거웠다. 불과 한 달 전 고향을 찾았을 때 길에서 그의 노모를 만나 인사를 여쭈었다. 늘 눈물이 그렁그렁한 어른이었다. 혼자 지내는 집이 무서울 거라며 아들이 대문을 해달아 드리겠다는 걸 노친은 괜한 돈 쓴다며 마다했노라 했다. 그래도 표정은 흐뭇했다.

빈소를 알아보려고 고향에 연락했더니 그 집 노친이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 받고 급히 떠났다는데 무슨 일이냐고 오히려 내게 소식을 물어 왔다. 아마도 며느리나 딸들이 노모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 죽음까지는 알리지 않은 눈치였다. 빈소를 찾아가는 밤길에도 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그 일을 겪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또 부음을 받았다. 손위동서였다. 병원을 찾았다가 암 진단을 받고 보름 만에 떠나고 말았다. 그 역시 어린 아내와 두 자식을 둔 새파란 가장이었다. 동기 잃은 고통은 둘째 치고 당장 시골에 계신 연로한 장인, 장모에게 이 비보를 어떻게 전할까 걱정이었다. 꿈길 한 번 사나와도 도회지 자식들에게 전화해 안부 묻고 몸조심 당부를 잊지 않는 노인네들이었다. 더구나 매년 여름휴가에는 그 형님네와 더불어 처가를 찾은 터라 올해도 기다리고 계실 터였다.

알리는 것도 알리지 않는 것도 불효인 것이 부모 앞서는 자식의 부음이다. 일을 당해 보니 새삼 뼈저렸다. 자식들끼리 머리 맞대고 고민했다. 당장은 알리지 않는 게 도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전화로 알릴 일도 아니고 먼 길 모셔 올 수도 없는 분들이라 차차 찾아뵙고 말씀드리기로 했다. 우리로서도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일단 장례 치르고, 그 유가족부터 챙겨놓고 봐야 했다.

시골 사는 처형은 자식이 세상 떠난 사실을 모르고 사는 노인들이 자기 동네에 여럿이라고 전했다. 믿기지 않지만 그 작은 마을에도 그런 집이 세 가구는 된다는데 미국으로 돈 벌러 갔다, 원양어선을 탔다, 그리 알고 지낸다는 거였다. 더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부모와 소식 없이 지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고도 하였다. 다 옛 드라마 같은 얘기였다. 그 노인네들 중에는 끝내 모르고 가는 노인네들도 있을 테고, 더러는 짐작하고도 내색 않고 사는 노인들도 있을 터였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우리는 어른들을 뵈러 갔다. 어른들의 안색을 살피고 나서 어렵게 말씀을 드렸다. 뜬금없는 소식에 노인들은 충격이 커 보였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보다는 잘 견디어 주었다. 그 순간에도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슬픔을 속으로 새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식들 가고 나면 두 양주는 서로 모르게 밤이면 베갯잇을 적실 것이다. 당신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지 시름이 깊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불쌍하고 무정한 사위는 끝내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작가소개
이야기 들려주는 남자, 전성태 님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 실천문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과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가 있으며,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