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엔 시장 한 귀퉁이에 김장 시장이 서고, 배추며 무 그득히 사들여 동네잔치처럼 떠들썩하게 모여 김장을 마치고 나면, 회색빛으로 찌푸렸던 하늘에서 첫눈도 펄펄 내리곤 했지요.


갈치조림, 김장 양념들과 함께 버무려 무쳐낸 겉절이, 그리고 김장 담그고 남은 배추를 넣어 말갛게 끊인 된장국에 뜨거운 밥 말아 입천장 데지 않으려고 후후 불며 먹고 나면 이내 어두워졌지요.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김장을 다 끝내고도 늦도록 어둠 속에서 뒷정리 하느라고 밖에서 그릇들을 달그락거렸습니다.
1년 새 키가 훌쩍 자라 짧아진 내복 바지를 입은 나는 이불 속을 파고들어가 그 소리를 아련히 들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든 게 어제 같습니다.

군색스러움이야 어디 이
단칸방의 이불덩어리 하나뿐이랴
부뚜막에 걸려 있는 
백철솥뿐이랴

입동지나고 해가 짧으매
변두리 이곳에 겨울이 빨리 닥쳐오리니
아이들은 일 년 동안 키가 자라서
지난해의 바지 길이가 짧아져 있고

여름 동안 뛰놀다 다친 복상씨 뼈
그 시커먼 생채기를 가려주지 못한다.

그러나 어디 가난이 그렇게 
초조하기만 하랴
굴다리 빈 공터에 어둠 드리우면
단칸방에 어느새 불이 켜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야트막한 골목으로 피어나는 것을
어디 가난이 그렇게 쓸쓸하기만 하랴

연탄광 한구석에 묻지도 못한 항아리 하나
달랑무우 한 접 김치도
이 겨울에 발갛게 익어가고 있다.
                                                 - 김명수의 달랑무우 김치

겨울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달픈 계절이지요. ‘부뚜막’, ‘백철솥’, ‘단칸방’, ‘연탄광’......


젊은 사람들에겐 이런 정서는커녕 어휘조차 생경하겠지요. 예전에는 연탄 몇 백 장씩 사서 광에 가지런히 쌓아놓는 것은 부자들이나 누리는 호사였지요. 서민들은 추운 겨울날 그때그때 스무 장 삼십 장씩 들여놓곤 했지요.

 

지금이나 그때나 추운 겨울은 이상하게도 가난한 동네에 먼저 찾아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래도 연탄광 한 구석에 땅에 묻지도 못한 채 천덕꾸러기 같이 방치된 항아리 속에서 총각무는 발갛게 익어갔던 것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어디 가난이 그렇게 쓸쓸하기만 하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날은 문득 아버지 돌아가시고 멀리 홀로 계시는 어머니며, 외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 얼굴도 떠올라 갑자기 목이 메기도 하지요. 목이 시려 목도리를 하고 시린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책상 앞에 앉아 몇 자 적어 봅니다.

 

다들 안녕하시지요? 수졸재 주민이 멀리 있는 그대에게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겨울을 기원합니다. 아니 겨울은 좀 추워야 하는 것인가요?

 

글 출처 : 느림과 비움(장석주 : 뿌리와 이파리) 中에서..

 


배경음악 : Russian Gipsyswing / Lendv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