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침 해가 지난밤의 평화와 안식을 깨우며 부드럽게 세상을 도닥이는 시간이다. 남들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일 터이다. 그 시간이 바로 그가 지난밤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일하다는 건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 생체 리듬이 뒤바뀌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기꺼이 그 시간의 일을 자청한 것은 밤일의 급료가 낮에 일하는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의 공단에서 일을 했다. 공장에 출근하는 길에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또래 학생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악착같이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품었다. 그러나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삶이 바뀌지 않았고, 그만큼 좌절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함께 자란 친구들과 늘 뛰놀던 뒷동산이 눈에 밟힐수록 마음의 상처는 깊어졌다.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도 마쳤다. 그대는 하루 네 시간 이상 자는 게 소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면서 같은 공단에 있는 회사에서 경리 일을 보던 아가시를 사귀어 결혼도 했다. 물론 정식으로 결혼할 형편이 되지 않아서 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여러 명의 형제들과 부대끼며 살다가 홀로 서울에서 외롭게 살았던 처라 아이들의 존재는 너무나 고맙고 소중했다.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이 그에게는 큰 아픔이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야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서남아시아(흔히 중동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잘못 본 것이고 아시아 대륙에 있는 그 지역은 분명 서남아시아라고 해야 맞다) 건설 현장에 가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토록 소중하고 애틋하게 생각하는 이이들을 몇 해 동안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결심이 힘들었다. 그러나 눈 딱 감고 몇 년 만 열심히 일하면 작은 집 하나 마련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뜨거운 사막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숨도 조ㅔ대로 쉴 수 없는 끔찍한 더위 속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도 그는 늘 지갑에 간직한 가족사진을 보며 견뎌냈다. 처음에는 한 2년쯤이면 되겠거니 계획했던 일이었지만, 그가 벌어들인 수입보다 집값이 더 빠르게 올라서 결국 5년 동안 그곳에서 일해야 했다. 아이들과 아내가 자꾸만 눈에 밟혀 눈물 흘렸던 적이 낙타털만음이나 많았다. 그래도 참고 견디며 일했다.

    그렇게 그리움을 애써 참고 열심히 일한 덕택에 내 집을 마련했다. 새집에 들어간 그날 부부는 밤새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러나 산 넘어 또 산이 있었다. 결혼 후 악착같이 일해서 10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하자, 이제는 두 아이들 가르치고 키우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외나 비싼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이런저런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다. 다시 해외로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건 도저치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열심히,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이이들은 야간 자율학습이나 학원 수강 때문에 한밤중에 돌아왔고, 피곤에 지친 자신 역시 아이들을 보지도 못하고 잠들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 교육에 대해 자신이 상담을 해주거나 도와줄 게 없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큰아이는 고맙게도 그 흔한 과외 한 번 받지 않고 가고 싶어 하던 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런데 입학 비용이며 등록금은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었다. 그는 야간 근무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평생 일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식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다시 힘을 낸다.

   

    올해 대학에 진학한 아들은 기쁨도 잠시, 어느새 고민에 빠졌다. 요즘처럼 취업이 최대 관건인 상황에서 이른바 스펙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도 고민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아 집안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것과 적어도 용돈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대학 생활의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은 힘들었다. 힘들 때마다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자신을 키워주셨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는 그렇게 적은 돈이나마 버는 게 부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학금도 놓칠 수 없는 터라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가곤 했다. 남들은 억압에서 벗어난 대학생이 되었다고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술도 마시지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때로는 여유로운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피보다는 힘든 삶 속에서도 자신을 위해 애쓰시는 부모님의 사랑의 부피가 훨씬 더 크기에, 그는 그런 부러움이나 아쉬운 원망은 금세 접고 오늘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늦데 돌아온 아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다. 그러지 마시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어야 한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리신다. 그러고는 다시 새벽에 일어나 동생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기다리신다. 어머니 머리에도 언젠가부터 조금씩 흰 머리칼이 보이더니 자꾸만 늘고 있다. 그 모습에 아들은 마음이 짠해진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렇게 잔한 마음에 속으로 눈물이 맺힌다. 그런데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어렵기만 하다. 아주 어렸을 때 멀리 타국에 가 계셔서 함께할 수 없었으니, 부자간에 있을 법한 살가운 기억도 별로 없다. 귀국하셔서 항상 바빠 일하시느라 늦은 밤 귀가하셨고, 나중에는 아예 야근만 하시는 까닭에 늘 엇갈려 살았다. 어떤 때는 오히려 그게 편했고, 가끔 아버지와 마주할 때는 데면데면하고 불편했다. 어쩌다 뭘 물어보시면 짧게 대답만 드릴 뿐 자신이 먼저 아버지께 다가간 기억은 없다.

    아버지가 퇴근하실 때는 가족 모두가 현관에서 맞이하기 때문에 장남인 그도 그 자리에 늘 함께였다. 하지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하루는 약주 한잔하시고 들어오시면서 아버지가 푸념처럼 말씀 하셨다.

    “나는 이 집에서 손님 같구나.”

    그 말에 아들은 뜨끔하고 죄송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섭섭한 마음을 덜어드릴 수 있을지 몰라 안타깝기만 했을 뿐이다.

    그 뒤 아버지의 뒷모습이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늘 어려워할 뿐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법을 몰랐으니 말이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휴일 오후, 아버지는 눈을 떴다. 지난 한 주의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는지 잠에서 깨도 개운하지 않았다. 하기야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 잠을 자는 건 생리적 리듬과 어긋나기 때문에 잠을 자도 잔 것 같기 않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때 갑자기 안방 문이 열렸다. 아들이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놀라고 의아해 저절로 엉거주춤 몸을 세웠다.

    “아빠,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발 닦아드릴게요.”

    언제부터인가 아들은 ‘아빠’ 대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철들면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걸 알면서도 못내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외국에 나가 일할 때 아이들이 ‘아빠’하고 불러주는 소리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런데 아들 녀석은 갑자기 호칭부터 닭살 돋게 하더니 실ㄷ하고 손사래 쳐도 기어이 발을 끌어다 대야에 담갔다. 아버지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했다 .부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호사냐? 너 혹시······.”

    아버지는 용돈 좀 달라는 아들의 애교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잖아도 대학생 아들에게 용돈을 넉넉히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사실은 숙제예요.”

    아들은 수줍게 말했다.

    “유치원도 아니고 대학에서 이런 숙제를 내주니?”

    “가족과의 대화라는 주제인데, 아버지의 발을 닦아드리면서 대화를 풀어보라는 뜻이랍니다.”

    “허허, 그 교수님이 제대로 된 숙제를 내주셨구나. 덕분에 애비가 호사를 누리는구나.”

    아들은 아버지의 거친 발을 천천히 씻으면서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의 발을 갈라지고 뒤틀리고 딱딱한 각질로 엉망이었다. 아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대야로 ‘똑’ 떨어졌다. 눈물이 보일세라 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아들과 시선이 부딪히는 게 계면쩍어 고래를 돌렸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들은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깨끗하게 닦아내고 로션까지 발라드렸다.

    “아빠, 아직도 집에 들어오시면 손님 같으세요? 죄송해요, 그런 느낌 드시게 해서.”

    아들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다 나도 어떻게 너희들과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늘 물러서 있었던 게 부끄럽구나. 가끔은 손님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 어색한 말이지만 나도 때론 위로받고 싶을 때가 있더구나. 하지만 가장이 힘들어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가족이 흔들릴 것 같아 참는다고 아무 말 안 한 것이, 오히려 가족들과 멀어진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래, 대학 생활은 할 만하니? 아르바이트에 너무 시간 뺏기지 마라.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지 일하라고 보낸 거 아니다. 아직 아빠가 일할 나이잖니.”

    “아빠도 너무 제 걱정만 하지 마세요. 이젠 아빠의 행복을 위해 사셔야죠.”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소주를 마시며 마냥 행복했다. 그동안 챙기고 따르지 못해 서로 미안해하고, 살가운 대화도 못한 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연 대화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버지는 손님이 아니라 아들의 동지였다.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그걸 알았으니.

글출처 : 위로가 필요한 시간(김경집, 조화로운삶) 中에서......